My New York 그림책에서 뉴욕필 연주를 듣기까지

남편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것을 묻길래 나는 <에사페카 살로넨 and 뉴욕필하모닉 with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공연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어 혼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들은 아들이 웬일로 자기도 가고 싶다고 했다.


“티켓값이 비싸니 이번엔 엄마 혼자 다녀올게.” 라고 했더니 남편은 둘이 같이 보라며 R석 티켓 두 장을 바로 구매해 주었다. 가끔씩 남편은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한다.

이번 공연은 뉴욕필 연주에 협연자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게다가 프로그램은 베토벤이었다. 나는 작년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피아노 리사이틀을 보러 갔었다. 음악평론가와 클래식 애호가들이 그의 연주를 극찬하길래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사실 나는 그만한 감동을 받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잘 몰랐다. 지메르만 연주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연주 장소도 내가 좋아하는 콘서트홀이고, 프로그램 역시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어서 다시 한번 기대감을 안고 아트센터인천으로 향했다.

공연 시작 15분 전 연주회장에 들어갔더니 흰색 자켓 차림의 뉴욕필 단원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단원들이 검은색이 아닌 다른 색상의 옷을 입은 것이 이색적이었다. 프로그램북에 나온 오케스트라 명단에는 한국인이 꽤 많았다. 이번 무대에도 동양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눈에 띄었다.

공연 시작 바로 전 관객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연 중에는 일체의 녹음 및 촬영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 멘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음악을 마음에 담기보다 녹음 버튼을 먼저 누르는 관객을 보면 가슴이 아플 것 같다는 협연자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는 녹음에 매우 예민하며 공연장에 자신의 피아노를 직접 가지고 다닐 만큼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그런 점이 너무 까탈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다른 공연보다 관객으로서 긴장감을 갖게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그가 전하려는 음악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듯하다. 매번 공연장에서 따-란(솔-도) 울리는 촬영음이 무척이나 거슬렸는데 이날은 그런 소리 하나 없이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지메르만의 허밍 소리까지 들릴 만큼.

은발의 지메르만은 악보를 피아노 안쪽에 툭 올려놓고 무심히 넘겨가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했다. 이 곡은 일반적인 협주곡과는 달리 피아노의 독주로 시작한다. 또한 다른 협주곡에 비해 피아노 솔로 부분이 많아 그의 연주를 집중해 듣기 좋았다.

작년에는 몰랐다. 그가 이토록 섬세하고 투명한 연주를 하는지. 70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투박하거나 뭉개진 음 없이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행여나 깨질 듯 음을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다루며 흘러가는 음악이 몸에 힘이 쭉 빠질만큼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특히 1악장 후반부의 카덴차에서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청명한 속삭임 같았던 그의 카덴차는 이른 아침의 숲을 떠올리게 했다.

작년 그의 연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연주 중간의 긴 멈춤이었다. 연주를 까먹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낯설었다. 이번 연주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쉼의 의미가 납득이 되었다. 그것도 음악의 일부로 다가왔고, 감정의 흐름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가 연주하는 쇼팽을 앵콜로 다시 한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앵콜이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래도 오늘 연주로 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로 지메르만을 꼽는지 알게 됐다.

2부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3번>이 연주되었다. 솔직히 1부 협주곡에서는 뉴욕필 연주가 매우 흡족스럽지는 않았다. 연주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빈, 베를린,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런던심포니 등 유럽의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느껴지는 놀라움은 덜했다. 나는 각 악기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하나로 밀도 있게 어우러지는 연주를 좋아하는데 뉴욕필은 화합보다는 개별 악기들의 개성이 강조된 듯 들렸다. 그런데 2부 교향곡 연주는 아주 좋았다. 특히 오보에의 솔로가 너무 훌륭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깊은 서사가 느껴졌다. 음악에 푹 빠져있는 듯한 살로멘의 지휘도 인상적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벅차오르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이가 이번 음악회에 관심을 보였던 건 ‘뉴욕필’ 공연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는 어렸을 때 Kathy Jakobsen의 <My New York>이란 그림책을 닳도록 봤었다. 책에는 센트럴파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연사 박물관 등이 세밀하고 환상적인 그림으로 담겨져 있다. 아이는 유치원 때 근사한 공원을 그린 후 그림 아래 뉴욕이라고 썼었다. 어릴 적 보았던 그림책에서 시작된 뉴욕에 대한 동경이 마음 속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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