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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Feb 14. 2021

삶과 아파트

라이프 아파트


 엄마는 우리가 곧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 갈 거라고 했다. 이사 갈 아파트는 용인버스터미널 근처에 ‘라이프아파트’라고 했다. 

“아파트가 18층까지 있는데 우리집은 13층이야. 이 집보다 두 배도 넘게 커. 방도 세 개에 화장실도 두 개야. 안방 안에도 화장실이 있어. 너 새집 가보면 깜짝 놀랄 거다. 꼭 궁궐 같다니까.” 

엄마는 가스레인지에 김을 구우시며 콧노래를 부르셨다. 라이프아파트는 용인군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아파트였다.(용인은 1996년에 용인군에서 용인시로 승격되었다.) 

나는 엄마에게서 처음 ‘라이프아파트’라는 이름을 듣게 된 순간부터 반해버렸다. 영어로 된 아파트 이름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당시 살던 주공아파트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근사해 보였다. 

이사를 간다고 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내 방이 생긴다는 거였다. 더이상 남동생과 같은 방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제일 기뻤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으로 숨기고 싶은 게 많은 나이였다. 일기도 누가 보지 못하게 자물쇠와 열쇠가 달린 비밀일기장을 썼다. 나는 내 방이 절실했다. 

또 하나 기대되었던 것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방바닥에서 이불을 깔고 잤는데 이사를 가면 엄마가 침대를 사주신다고 했다. 침대가 있는 내 방이라니! 나는 엄마아빠께 감사한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나왔다. 뭔가 보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완전학습, 이달학습, 다달학습 등 문제집을 몇 권씩 풀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1993년 여름, 우리는 라이프아파트로 이사했다. 아파트는 두 동이 전부였지만 아찔하게 높고 거대했다. 아파트 뒤에는 산이 있었고, 앞쪽에 경안천이 흘렀다. 나는 사회시간에 배운 배산임수가 이곳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집은 무척 넓고 깨끗했다. 우리집이 잘살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른 내 방부터 들어가 보았다. 창에는 은은한 연한 보랏빛 커튼이 처져있었고, 그 아래 침대가 있었다. 침대헤드가 둥근 곡선 모양인 민트색 에이스침대였다.  

라이프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환경은 달라졌지만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주공아파트 살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같이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단짝이었던 정은이와 같은 아파트 라인에 살아 외롭지 않았다. 


중학교 때 하루는 교무실에 심부름을 갔다가 우리 아파트 위층에 사시는 음악 선생님을 만났다. 항상 곱게 화장을 하시고 가까이 가면 꽃향기가 나는 화려하고 우아하신 음악 선생님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나를 보고 반가워하시며 옆의 선생님에게 나를 소개하셨다. 

“나랑 같은 아파트 사는 애야.”

옆의 선생님은 그 말에 경계심을 낮추시는 듯 보였다. 나는 내심 라이프아파트에 산다는 자부심에 뿌듯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수원으로 다녔다. 당시에는 용인보다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가 대학 입시 성적이나 면학 분위기 면에서 더 나아 용인에서 수원시 고등학교로 다니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등하교는 버스 대신 친구들과 팀을 짜 통학용 승합차(봉고차)를 대절해 타고 다녔다. 매일 새벽 6시 20분쯤 봉고차가 아파트 후문으로 왔다. 새벽이면 엄마는 도시락 2개에, 내 아침밥까지 챙기느라 늘 분주했고, 아빠는 부엌 창문 밖으로 찻길을 내다보며 봉고차가 어디쯤 오는지 살피셨다. 아침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추운데 나가서 기다리지 말라는 아빠의 배려였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우리는 라이프아파트에 계속 살았다. 대학교 3학년 때는 나도 기숙사 생활을 하고, 동생도 지방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자 부모님은 집에 방이 비는 게 아깝다며 동생 방에 하숙을 두었다. 집 바로 옆에 대학교가 있어 하숙생은 금방 구할 수 있었다. 하숙생은 동생과 같은 나이인 속초에 사는 남자애였다. 나는 보통 주말에만 집에 오고, 그 애는 주말에 자기 집으로 가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어쩌다 주중에 집에 가면 그 애가 있어 집이 예전만큼 편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막상 하숙을 하니 신경 쓸 일이 많아지자 좀 후회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던 찰나 그 애가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는 바람에 우리집 하숙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점점 라이프아파트에 사는 것에 대해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울을 오고 가는 게 오래 걸리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들은 다 서울에 있었기에 신촌, 강남, 종로 등을 수시로 다녔는데 서울에서 우리 동네 가는 버스는 용인의 다른 동네에 비해 버스가 적고, 배차 간격도 길어 불편했다. 용인이 서울에 가까운 수지, 기흥 중심으로 개발 되면서 한 때 용인의 중심지였던 우리 동네는 점차 구도심이 되었다. 

터미널도 가깝고 근처에 대학까지 생겨 이 주변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는 말들은 항상 들려왔지만 아파트값은 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라이프아파트에서 13년을 살았고, 분양가에서 몇천만 원 오르지 않은 금액으로 팔았다.  

엄마는 종종 라이프아파트와 수지의 A 아파트가 분양가가 같았다고 그때 거길 분양받을 걸 그랬다며 아쉬워하셨다. 그러다가도 이내 수지는 아빠 직장과도 멀고 그 당시 거기가 허허벌판이어서 우리들 보낼 학교도 마땅치 않아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지금 A 아파트는 분양가의 10배 이상으로 아파트값이 올랐다. 




2021년, 아파트 가격이 무섭게 치솟고 있다. 나는 주변 지인들의 아파트 가격이 오른 소식을 듣고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집값이 오르긴 했지만 주변 시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오른 우리 아파트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들어 남편을 붙잡고 하소연한다. 

“우리 아파트는 왜 이렇게 안 오르지. 다들 몇억씩 올랐다는데.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대출 받아서 B에 아파트를 살걸 그랬나 봐. 그런데 거기 살면 내 직장도 멀고 친정과도 멀어져서 직장 다니며 도현이 키우기 힘들었을 거야. 게다가 거긴 다 아파트가 너무 오래 돼서 싫었어.”

“그럼 C에 아파트를 분양받을 걸 그랬나. 아니야. 난 거기 주위 환경이 어수선한 게 영 별루더라고. 애 키우기는 여기가 훨씬 좋아. 바로 뒤에 산도 있고, 공기도 좋고, 도서관도 가까워. 단지도 크고 조경도 예쁘잖아. 초등학교도 아파트 단지 안에 있고, 중학교 학군도 괜찮아. 예술의전당도 금방 가고!”

“그래. 여기가 공기도 좋지. 도현이 아토피도 여기로 이사 와서 나았잖아. 도현이 잘 키웠으면 된 거지 뭐.”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라이프아파트에서 우리 가족은 좋은 삶을 살았다. 우리 가족의 중요한 시절을 그곳에서 잘 보냈다. 나와 동생 모두 안정된 환경 속에서 중, 고등학교 생활을 잘 마쳤고, 원하는 학교와 직장에 들어갔다. 아빠도 직장과의 거리가 가까워 편하게 출퇴근하셨고, 직장생활도 성실히 임하셔서 직장 내에서 인정을 받으셨다. 

아파트가 변두리에 있어서 산과 하천 등 자연을 가까이하며,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에서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작아서 이웃들과 더 자주 마주치며 정을 나눌 수 있었다. 이사 다니지 않고 13년을 쭉 살아서 익숙하고 편안했다. 그 안정감이 좋았다. 나는 라이프아파트에서 보낸 시간들이 나의 삶을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아파트를 볼 때 아파트에서 사는 내 삶보다는 아파트의 경제적가치에 치우쳐 바라봤던 것 같다. 아파트 가격이 자꾸 아파트에서의 내 삶과 추억을 덮어버릴 때가 있다. 이제는 아파트를 내가 살고 있는 집, 나의 삶이 있는 곳으로 바라보며 살고 싶다. ‘라이프아파트’ 라는 이름을 다시 본다. 아파트에 ‘삶’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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