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붙여 노래로 부르고 싶었던 '시칠리아노'
아이는 요즘 자기 전 “엄마, ‘사탕요정의 춤’ 틀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이불을 덮는다. 음악 시간에 호두까기인형 발레 영상을 봤는데 이 곡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면서. 마침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연주회 프로그램에 호두까기인형 모음곡이 있었다. 프로그램을 보여주며 가겠냐고 묻자 아이는 대뜸 예술의전당이냐고 되물었다. 아이가 예술의전당을 좋아하는 건 순전히 예술의전당 안 모차르트 카페에서 파는 오징어먹물리조또 때문. 성남아트센터라고 하자 못내 아쉬워하면서 “그래도 설탕요정이니까”라고 말하며 오케이 표시를 했다.
며칠 전 아이는 유치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성남아트센터에서 <금난새의 오페라 이야기>를 봤다. 평소 같으면 1부만 보고 집에 가자고 했을 텐데 이날은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함께 보니 재밌었나 보다. 2부 끝까지 다 봤다. 그리고는 힘들다며 아무래도 토요일 공연은 못 가겠다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나는 몇 달 전부터 공연 포스터 화면을 캡처해두며 기다렸던 <피아니스트 박종해와 친구들>을 보러 갔다. 가뿐하게 나 홀로.
피아니스트 박종해를 처음 알게 된 건 4년 전 ‘평창 대관령 음악제’에서였다.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그의 독주회가 열렸는데 무척 특별했다. 악보를 보고 그대로 연주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음을 몇 개 정해주면 그걸 가지고 즉흥 연주를 하는 공연이었다. 그는 기승전결이 있는 음악을 순식간에 만들어 내더니 환상적으로 연주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음악. 그는 마치 ‘진짜 음악은 이런 거야.’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 후 나는 공연예매 사이트에 들어갈 때마다 검색창에 ‘박종해’를 입력해보며 그의 공연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1부 공연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금 이 시기에 듣기 좋은 곡들이 연주됐다. 바흐의 ‘오소서, 이방인의 구세주여’, ‘시칠리아노’,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과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인형 모음곡’. 인상적이었던 건 곡들이 모두 피아니스트가 편곡한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가끔 빌헬름 캠프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찾아 듣곤 했지만 그가 편곡까지 탁월한 줄은 미처 몰랐다.
연주곡 중 특히 ‘시칠리아노’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연주를 들으며 이 음악에 시를 붙여 노래로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반은 거의 보지 않고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갈망하듯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그는 피아노 앞이 아닌 음악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연주자의 깊은 몰입감은 나와 음악을 한층 더 긴밀하게 연결해주었다.
‘호두까기인형’을 연주할 때 그는 음을 입 모양으로 나타내면서 경쾌하게 연주했다. 피아노 버전으로 듣는 호두까기인형은 매력적이다. 굉장히 현란하여 아무나 연주할 수 없을 것 같다. 계절과도 어울리고 그의 재능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도 좋았으므로 영리한 선곡이었다고 본다. ‘사탕요정의 춤’이 나올 때 옆에 앉은 여자아이가 갑자기 반색하며 자기 가족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탕요정은 우리집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듯하다.
2부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 1번이었다. 오늘 공연의 하이라이트.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 비올리스트 김세준, 첼리스트 김두민이 함께했다. 40분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었다. 연주자들이 중간중간 주고받는 눈빛도 좋았고(이런 것도 음악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서로 신뢰하며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을 들을 때 나도 모르게 딴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 곡을 들을 때는 오로지 연주만 들었다. 4악장이 정말 강렬했다. 객석 오른쪽 앞자리에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앉아있었는데 그 아이들도 4악장이 연주될 때는 좌석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꼼짝없이 듣는 게 눈에 띄었다. 나 또한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음악에 둘러싸인 듯했다.
공연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켜고 유튜브에서 브람스 4중주 1번을 찾았다. 조성진의 루빈스타인 콩쿠르 파이널 A 영상이 상단에 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볼륨을 크게 키우고 운전하며 들었다. 조성진의 브람스 4중주도 역시나 대단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공연장에서 들은 연주가 더 좋았다. 이러니 공연장을 찾을 수밖에.
같은 날 예술의전당에서는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임윤찬도 이 공연에서 앵콜곡으로 ‘시칠리아노’를 연주했다고 한다. 그의 시칠리아노는 또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임윤찬 공연은 예매 첫날 불과 몇 분 만에 전석 매진되었다. 티켓 경쟁이 너무 치열해 반드시 예매자 본인만 신분증 확인 후 티켓을 수령할 수 있다는 이례적인 규칙까지 생길 정도다. 오늘 내가 본 공연은 생각보다 빈자리가 꽤 있었다. 조성진, 임윤찬만 훌륭한 게 아닌데. 우리나라에는 정말 실력 있는 멋진 연주자들이 많다. 사람들이 고루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그곳에만 진짜 음악이 흐르는 게 아니니까.
피아니스트 박종해와 친구들
Bach, Tchaikovsky and Brahms
2022.12.10. Sat 5pm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