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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Jan 08. 2023

해마다 새해가 되면 하고 싶은 일

극장에서 본 ’2023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새해 소원을 빌지 않았다. 채널을 수시로 돌려가며 각 방송사의 시상식을 보다가도 12시 보신각 종이 울리면 눈을 감고 소원을 빌던 나였는데. 2022년 마지막 날에는 유튜브를 보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이 들었다. 소원을 빌 수 없었다. 내 간절함을 소리 내어 말하면 기대하게 될 것 같아서. 하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법. 그때 내가 받을 실망과 좌절을 생각한다. 나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은, 그러니까 내가 가장 덜 다치는 쪽을 택한다. 방 한구석에 가방을 내려놓듯 무심히 놔두기로.    

 

새해를 기념해 해돋이를 보러 가거나 몇 박 며칠 여행을 떠날 기운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이벤트 없이 지나가기엔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는 크리스마스 때도 온종일 내복 차림으로 집에서 보냈다. 뭘 할까 고민하던 중 슈클(‘슈만과 클라라’ 클래식 음악 동호회 네이버 카페) 게시판에서 빈필 신년음악회를 메가박스에서 중계해준다는 글을 봤다. 나는 바로 메가박스 사이트로 들어가 <2023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를 예매했다.


사실 지난 6월에도 음악회를 보러 영화관에 갔었다. 10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아 우리 가족은 <2022 빈 필하모닉 여름음악회>를 봤다. 남편은 시험 준비로 시간을 많이 내기 어려운 상황이고,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든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고른 선택이었다. 모차르트를 좋아해 빈으로 신혼여행을 갔던 우리였으니까.     

 

어느덧 엄마보다 발이 더 커진 열 살 아들을 가운데 두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쇤브룬 궁전 야외무대에서 열린 음악회를 봤다. 영상은 무대 위 연주 장면만 비춰주는 게 아니라 쇤브룬 궁전 곳곳의 모습과 아름다운 정원, 빈의 저녁 풍경을 함께 담아 보여 줬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신혼여행 기억들이 음악 속에 하나둘 실려 왔다. 그날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 가족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1월 1일 저녁, 아이는 ‘신년음악회’를 흔쾌히 따라나섰다. 이유는 간단하다. 푹신한 소파에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볼 수 있고(리클라이너 좌석이다), 라지 사이즈 캐러멜 팝콘과 핫도그를 먹을 수 있기 때문. 실제 공연장에서는 보이는 장면이 제한적이지만 영화관에서는 화면이 수시로 바뀌며 연주자는 물론 뒤돌아 서 있는 지휘자의 표정과 손동작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극장에서 음악회를 보면 아이는 “엄마, 언제 끝나요?”라는 질문 없이 제법 진득하게 잘 본다.     


올해 신년음악회 지휘자는 프란츠 벨저 뫼스트. 오스트리아 대표 지휘자로 전에도 빈필 신년음악회 지휘를 맡은 적이 있다고 한다.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를 닮은 지휘자는 신사다운 외모처럼 깔끔하고 품위 있게 연주를 이끌었다. 이번 신년음악회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다. 음악회 역사상 처음으로 선보이는 곡들이 많다는 것과 빈 소년 합창단, 빈 소녀 합창단이 특별출연한다는 것.      


신년음악회는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의 왈츠와 폴카 중심으로 연주된다. 화사한 핑크빛 꽃장식으로 꾸며진 무대에서 신나고 흥겨운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는 나에게 그들은 손을 내밀며 춤을 추자고 하는 듯했다. 뮤지크페라인 황금홀을 입석까지 가득 메운 관중부터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카메라가 누굴 비추어도 밝고 들뜬 얼굴이었다. 새해를 맞는다는 건 이렇게 설레고 즐거운 일임을 그들의 표정을 보며 새삼 느꼈다. 음악회가 무르익을수록 황량했던 내 마음도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3년 전 클래식 FM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적이 있다. 아이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출근하는 아침에 대해 썼는데 운 좋게 당첨이 돼 빈 소년 합창단 내한 공연에 초대받았었다. 아이는 지금도 그때 푸른 눈의 소년들이 불렀던 ‘아리랑’을 기억한다. 빈 소년 합창단의 고요한 아침 같은 목소리를 새해 첫날 듣게 되니 특별한 선물을 다시 한번 받은 기분이었다.      


신년음악회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관객이 함께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이 아닐까? 우리는 음악회 현장에 있는 것처럼 지휘자의 유도에 따라 처음에는 약하게, 다음에는 크고 힘차게 손뼉을 쳤다. 조용했던 극장에서 아이와 내가 환호하며 신나게 손바닥을 마주치자 점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치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가 이렇게 희망차게 들렸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있는 힘껏 박수를 쳤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잘 될 거야.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이번 음악회에서 지휘자는 앙코르곡을 연주하기 전 객석을 향해 말했다.

“Friedrich Nietzsche said. Without music, life would be a mistake.”

아이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음악이 없는 인생은 실수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신년음악회로 새해를 시작한다는 건 꽤 괜찮은 일 같다. 소원조차 빌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희망을 품게 해주었으니. 우리 삶에 음악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다. 나 또한 니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해마다 새해가 되면 아이 손을 잡고 신년음악회를 보러 가고 싶다. 물론 그곳이 빈이 아니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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