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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Nov 06. 2024

존재의 소리, 문장 속 음악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읽고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는 중 그녀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배수아. 신간이 나온 것이다. 단독 소설은 아니었고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그녀가 쓴 <바우키스의 말>이 수상작이다. 지금까지 배수아의 책을 두 권 읽었다. 에세이 <작별들 순간들>과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그녀의 글을 사랑한다. 지난여름 영국 여행에 단 한 권의 책만 챙겨갈 수 있었을 때도 배수아의 책을 골랐다. 그녀의 글은 나에게 아름다움 그 자체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책의 가름끈이 마지막 페이지에 있지는 못하다. 작가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아 종종 문장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외면할 수 없다. 책상 가까이에 두고 언제나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은 책이다. 읽고 나면 정확한 문장보다는 이러한 풍경과 느낌이 생생하게 남는다.   

  

공기는 차갑지만 달콤한 향이 감돈다. 숲과 호수가 가까운 오두막에 앉아 따뜻한 차를 머그잔에 담아 한 모금 마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새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오두막 주위를 걷다가 오래된 책을 꺼내 읽은 후 책상 앞으로 가 글을 쓴다. 쓰긴 전에는 몰랐던 세계가 펼쳐진다. 어느새 어둠이 서서히 스며든다.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을 느끼며 나만의 이야기가 천천히 완성되어 간다.     


<바우키스의 말>을 읽을 때도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헤매기도 하다, 문득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느리게 읽어나갔다. 결국 다 읽었지만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지지 않아 인덱스를 붙여 두었던 부분을 다시 읽으며 문장을 하나하나 옮겨 적어 보았다. 그제야 희미하게 보였던 것들이 점점 또렷해지며 내 마음에 닿았다. 그녀의 소설에는 내가 사랑하는 순간들과 장면들이 가득하다. 




보리수 안의 바람, 강비탈에 핀 부처꽃들의 기울어짐, 언젠가 붉은 가을, 자갈을 밝으며 다가오는 발자국, 기차가 도착하는 신호음,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책상 위의 편지들이 흩어지는 소리, 서로 은밀하게 마주 잡는 두 손, 새들이 만들어내는 허공, 하나의 편지 위로 내려앉는 또 다른 편지, 그리고 붉은 가을. 오직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음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마침내 모든 음들이 소리의 최소 성분으로 수렴될 때까지. 멜로디 없는 음악. 최소의 음악. 돌과 나무의 내부로부터, 저절로-중얼거림. 겨울 아침 서리의 속삭임. 지금 여기 없는 것들의 기억. 그 어휘가 무엇일까. 강물에 비친 하루.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45쪽)



                                  

감각적이고 음악적인 글이 좋다. 마지막 문장까지 옮겨 적고 나니 작가가 왜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떠오른다. <4분 33초>는 연주자가 연주하지 않고 침묵을 통해 주변의 소리를 음악으로 느끼도록 유도하며 음악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바우키스의 말>에서도 지금 여기 없는 것들을 향해 귀를 기울임으로써(45쪽) 존재의 흔적과 자연의 소리를 자신만의 음악으로 삼는 장면이 있다. 바우키스가 나무로 변하며 사라지지만 울림을 남기고, 그 울림은 결국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몇 년 전 인천아트센터에서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의 ‘바흐 소나타 파르티타’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안내방송에서 연주자가 관객들에게 여음이 끝날 때까지 박수를 삼가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나왔다. 카바코스가 강조한 ‘여음’은 <바우키스의 말>에서 소리가 사라진 후 남겨진 흔적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라진 소리와 그 울림을 느끼며 음악이 깊이 스며드는 시간, 그는 우리에게 소리의 일부가 되어가는(47쪽) 순간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최근 나는 괴로웠다. 직장과 가정에서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며 그것이 나에게 불리할 때 분노와 억울함에 휩싸였다. 어떻게든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려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고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에 일상이 흔들렸다.     

책을 읽고 나니 그런 것들에 갇혀 나를 둘러싼 소중한 것들과 하루의 기쁨들을 놓치고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때일수록 그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나를 이루는 생각과 감정을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과 여운을 음미하며 잊히기 쉬운 감각과 본질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녀의 글을 읽고 고개를 들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아, 이 모든 것들이 내 곁에 있었구나.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작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것이다. 한 번 공명한 소리는 사라지지 않기에(52쪽)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책을.     

 

그녀가 쐐기풀을 이야기하며 사랑을 말하듯,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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