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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Nov 14. 2024

고통을 묻는 다정함

<어떻게 지내요>와 <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

3년 전 가을밤이었다. 그날 밤은 목도리를 단단히 감고 나갔을 정도로 공기가 차가웠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시골 책방 마당 한 편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독서 모임 사람들과 둘러앉아 책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가며 각자 좋았던 책을 한 권씩 소개했는데 그때 내가 가져간 책이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였다.      


수험서처럼 줄줄이 밑줄을 그어놓은 페이지들 속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을 고민 끝에 골라 읽었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나는 조심스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에게는 영영 먼 이야기일 줄 알았던 죽음이 얼마 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성큼 내 앞에 다가온 느낌이었다. 마흔이 넘어서도 죽음이란 건 여전히 무섭고 두려웠다. 그렇게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 소설인 <어떻게 지내요>를 오랜만에 다시 펼쳐 들자 그 밤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서 <룸 넥스트 도어>를 보러 옆 동네 영화관을 찾았다. 겉으로 보기엔 여유로운 외출 같지만 속마음은 답답하고 무겁기만 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끙끙거리며 풀다 결국 연필을 내려놓고 책을 덮어버린 듯한 마음이었다. 일주일 내내 남편과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지냈다. 심란한 마음으로 어두운 극장 안에서 들어섰고 대여섯 명 남짓한 관객들과 거리를 두고 앉아 영화를 봤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마음의 변화가 일었다.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의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아서였다.

“희망이 없는 게 아니야.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 말은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삶을 대하는 그녀의 다정하고 긍정적인 태도는 내가 지향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 나 역시 한때는 그런 희망과 따뜻함을 품고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다만 그것이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뿐. 내 안에 있던 생기와 용기를 되찾기로 했다. 잉그리드처럼 어둠보다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예기치 않게 삶의 끝을 맞이한 마사(틸다 스윈튼)를 보며 삶의 유한함이 크게 다가왔다. 이 삶이 곧 끝난다고 생각하니 그토록 무겁게 나를 짓눌렀던 일들이 한순간 사소해진다. 미워하고 불만을 갖는 일은 그만두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껏 사랑을 표현해야겠다는 다짐이 먼저 든다. 마사가 떠난 그 모습처럼 나 역시 존엄을 지키며 아름다운 순간 속에서 평온하게 삶을 마무리하길 바란다. 마사의 죽음은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에드워드 호퍼의 <People in the Sun> 그림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듯했다.      


죽음을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가끔 내 마지막 순간을 그려보곤 한다. 내가 사랑하는 장소에서 내가 사랑했던 것들에 둘러싸여 가고 싶다. 슈만의 <피아노 4중주 1번 3악장> 멜로디가 잔잔히 흘러나오고, 내가 사랑했던 삶의 장면들이 내 곁을 지키는 가운데 너무 슬프지 않게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를 보러 갈 때는 바람이 쓸쓸히 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 햇볕이 따스했다. 집 근처엔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 가득하고 저마다의 색깔로 물들어 풍성해진 가을숲이 나를 감쌌다. 가을 열매 때문인지 공기마저 달콤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이 좋아하는 오징어를 듬뿍 넣고 부추를 듬성듬성 썰어 두툼한 부침개를 부쳤다. 후라이팬의 지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남편에게 느꼈던 서운함을 되짚어 봤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불만과 타박이 아니라 어려움과 아픔을 다정하게 물어보고 이해하려는 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지내요?”라는 질문이 프랑스어로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라고 번역된다고 한다. 책에서 유독 마음에 오래 남았던 문장은 “친절하라. 네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으니.”였다. 남편 또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여야 하지 않을까.      


잉그리드의 다정함을 나도 하나씩 실천해보려 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므로, 그렇게 살아가면 죽음이 와도 후회 없이 홀가분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마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good-bye라고 쓴 편지가 잊히지 않는다. 나도 담담하고 평온한 마지막 편지를 쓰고 싶다. 그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책, 음악, 그림, 영화가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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