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를 뒤집어쓴 봄에서 겨울에 이르기까지
저는 이 일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따라 화훼시장에 방문해봤습니다. 마침 계절은 봄이었는데, 아직 차가운 바깥공기와는 달리 얼굴을 활짝 내놓았던 꽃들과 뿌연 흙먼지가 떠오릅니다. 지금처럼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쓰지 않을 시절인데 선생님은 화훼시장 방문 준비물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얘기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화훼시장에 도착해 그늘이 없는 하우스 단지 사이사이를 메꾼 뿌연 흙먼지를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양재 화훼시장처럼 규격화된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화훼단지는 하우스 여러 동이 모인 비포장 길 위에 있습니다. 건조한 계절, 차에서 내리고 나면 내 차가 일으킨 먼지를 마시기 딱 좋은 상태가 됩니다. 식물을 판매하는 하우스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가 적습니다. 그렇게 볕을 쬐며 달아오른 하우스는 봄에서 여름까지 식물을 왕성하게 키워냅니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작업량을 늘리겠다고 혼자 차를 몰고 다니며 화훼시장을 방문하던 시기에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흔한 스타일의 옷도 막상 구하려면 없는 것처럼, 딱 구미에 맞는 식물이 없어서 배가 고픈 것도 잊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포트폴리오를 쌓겠다는 생각으로 지인의 공간을 스타일링 해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용감한 일이었습니다. 시도가 많았던 만큼 다양한 식물을 사보았고 많이 죽이기도 했지만 흙과 화기의 궁합이라든가 광량에 따른 식물의 변화 같은 사소한 감각을 많이 익혔습니다.
그 당시 들고 다니던 하얀색 수첩은 귀여운 오해를 낳았습니다. 스타일링 해야 할 공간 조건과 그에 맞는 식물의 수형 같은 것들을 스케치해둔 것인데, 그것만 들고나가면 “실장님이세요?”, “꽃집 하시나 봐?”, “얼마나 필요한데?”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화훼시장 사장님들은 그걸 일반 소비자와 사업자를 구분하는 표시로 읽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그런 질문이 어색하기도 하고 사실과 다르기도 해서 고개를 저었지만 이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으로 무마하고 저도 궁금한 것을 질문합니다.
화훼시장의 성수기는 역시 2월에서 5월 사이입니다. 졸업식, 입학식, 식목일, 가정의 달까지, 대목이 줄줄이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봄에는 시장 방문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화훼시장 사장님들과의 대화 속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얻는데, 이렇게 바쁜 시기에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시장 사장님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상대적으로 손님이 적은 한겨울의 화훼시장을 좋아합니다. 코끝이 시린 바깥에서 식물을 위해 난로를 뗀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면 포근한 느낌마저 듭니다. 한겨울에는 볼 게 없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한겨울에도 자기 계절을 만난 나무는 어김없이 꽃을 피웁니다. 잎을 떨군 나무는 자신만이 가진 선을 유감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멋진 나무를 알아보기 쉬운 계절이기도 합니다.
뿌연 흙먼지를 마신 봄, 마음만 바빴던 여름을 지나 다시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화훼시장이 주는 느낌이 참 많이 변했습니다.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눈으로 익힌 가게들이 익숙해졌고 낯설기만 한 호칭도 덤덤합니다. 질문이 많으면 귀찮아하실까 하던 걱정은 '안 바쁠 때를 노리자'로 바뀌었습니다. 구입한 식물을 포장하다 말고 "차 한 잔 드릴까?" 묻는 사장님의 한 마디가 참 감사합니다. 화훼시장을 언제 가면 가장 좋으냐 물으신다면, 다가오는 겨울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