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과 가라앉음, 그만의 속도
식물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쩍 줄었지만 초반만 해도 하고 많은 것 중에 왜 식물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누군가를 이미 좋아하고 나서는 내가 왜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왜 식물이냐는 호기심 어린 눈이 만족할만한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연스럽게, “글쎄요, 왜일까요?”라는 말 대신할 수 있는, 진짜 이유를 탐구해보게 됐습니다.
고요함과 가라앉음
식물을 돌볼 때 관리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흙이 물을 머금는 소리나 흙을 만질 때 나는 까슬까슬한 소리, 마침 딱 거기가 간지러웠다는 듯 가지가 깨끗하게 잘려나가는 소리, 잘려나간 잎이 시간이 지나 바스러지는 소리.
그런데 가만 보니 식물 자체보다 이런 소리를 발생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물을 주고 흙을 다지고 가지를 다듬고 식물과 그 주변을 정리하는, 가드닝 과정에 수반되는 수많은 ‘동사’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형용사(상태)가 아니라 동사(행위)라는 말을 식물을 다루며 체감하게 됐습니다.
생각이 많아 머리가 쉴 틈이 없는 저에겐 생각을 멈추게 해주는 이 동사들이 잘 맞았습니다. 식물을 들여다보며 계속 손을 움직이면 그때만큼은 세상 모든 소음이 차단되듯 조용한 시공간에 놓이고 잡다한 생각이 가라앉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운동으로는 수영을 즐기는 편인데요, 수영을 할 때도 고요한 물속에서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순간을 참 좋아합니다. 수영을 할 때와 식물을 만질 때의 마음 상태, 고요한 가운데서 부유하던 생각이 가라앉는 느낌이 꽤나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그만의 속도
저는 낮에는 빠르고 정확해야 하는 일을 합니다. 이 일에서 느려서 좋거나 유리한 점은 거의 없는 편이고 빠를수록 좋습니다. 자연히 이 일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두르게 하고 효율에 집착하게 합니다. 이제는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삼는 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습니다.
식물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생물이기에 자기 속도와 계절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보채도 이 속도에 협상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실합니다. 누가 보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덤덤하게 싹을 내고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느리다 할 수도 빠르다 할 수도 있겠지만 식물은 누구와 비교해서 속도를 내지 않기에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오로지 자기 속도만 있을 뿐입니다.
마음 급한 관리자는 자주 실수를 저지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화기를 바꾸고, 그 화기에 부랴부랴 적응 중인데 영양제를 투하하거나 자주 관수해 뿌리에 무리를 줍니다. 이 과정을 견뎌주는 강한 친구는 끝내 적응해 뿌리를 확장할지 모르지만 환경 변화에 예민하고 적응력이 약한 친구는 이 과정에서 죽는 일도 허다합니다.
저 역시 이 일을 ‘효율’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작업을 서두르다 애꿎은 식물을 아프게 한 과거가 있습니다. 한 번은 전정에 힘을 주다가 너무 많은 양을 한 번에 쳐내 길거리 가로수처럼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해를 바라보도록 방향만 잡아주고는 구석에 방치해두었는데, 어느 날 보니 계절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새잎을 내고 해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유려하게 가지를 뻗어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식물들과 지내며 제가 가진 조급함이 많이 달래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기복 없이 자기 속도로 유유히 움직이고, 환경에 대한 불평 없이 그때그때 자기 할 일을 하는 식물들이 참 품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힘든 때도 있지만 그건 그저 지나가는 한 계절일 뿐이야” 하고 흘려보내는 단단한 어른 같다고 할까요?
식물을 주제로 일을 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관련 산업도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 가운데서 트렌드가 변하는 만큼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급 해지는 때가 자주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그냥 네 속도로 가면 돼”라고 몸소 보여주는 식물이 저의 작업 주제라 참 다행이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