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지고 넓어지는 즐거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낄 수 있다는 말. 너무 뻔하지만 식물을 다루며 인지할 수 있게 된 감각의 영역을 이야기하기에 참 적절한 말입니다. 절기에 따라 바뀌는 빛의 길이와 색, 그저 흙냄새인 줄 알았던 공기 중 향기, 가지치기를 한 뒤 며칠 새 돋아난 아주 작은 잎눈. 미세한 자연의 변화를 감각하게 된 이후 “농부의 마음이란 이런 걸까?” 하고 농담을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 즐기기 좋은 건 단연 꼬맹이 잎눈일 것입니다. 아직은 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늦가을 내지는 겨울 초입에는 돌아올 봄에 더 탄력을 받아 자랄 수 있도록 가지치기를 해줍니다. 삐죽 혼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거나 성장세가 좋아 밀도가 높았던 곳 등 균형감을 해치는 가지들이 그 대상입니다. 올 해는 고광나무(Philadelphus schrenkii Rupr.)의 활약이 좋았습니다. 신중하게 고른다고 골랐는데 성장세가 좋았던 탓에 너무 많이 잘려 나온 가지들을 보며 은근히 걱정했던 것도 잠시, 자른 가지들 끝에 금세 귀여운 잎눈이 쌍으로 맺혔습니다. 성격이 급한 잎눈은 그새를 못 참고 조금 커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온실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른 봄이 되면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리는 일이 즐겁습니다. 버스정류장 주변 화단에 자리한 회양목(Buxus koreana Nakai ex Chung & al.)이 피워낸 꽃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섭니다. 그 향기가 유독 향긋하다 느껴지던 날, 같이 산책하던 친구에게 “이 향기 너무 좋지?” 하고 동의를 구했는데 “무슨 향기?” 하고 눈을 땡그랗게 뜬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생각해보니 봄이면 흙 속에서 새싹이 움트며 발생하는 흙냄새 때문에 저 역시 회양목 꽃 향기를 그다지 감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실은 꽃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 사진을 보고 '이 나무가 봄꽃을 피우는 그 나무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길에서 아주 흔히 마주치는, 나무 사이로 쓰레기 하나쯤 끼워져 있는 그 나무가 맞습니다. 겨울 추위나 공해에도 강해서 화단에 많이 심기는데, 길에서 많은 수모를 당하는 흔하디 흔한 나무이기도 하고 새순과 꽃의 색상이 크게 구별되지 않는 탓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꽃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이른 봄, 공기 중에 달콤한 향을 맡게 되신다면 화단에서 회양목 꽃을 한번 찾아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런가 하면 밤나무(Castanea crenata Siebold & Zucc.)는 여름마다 상당히 노골적인 향을 뿜어내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저는 ‘밤나무의 마을’이란 뜻을 가진 아버지 고향 마을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주변에 밤나무가 꽤 많은 편이라 가을이면 산책하다 밤송이 몇 개쯤 들춰보는 재미를 즐기는 편이었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밤나무를 봤어도 가을철 밤송이가 떨어질 때야 올려다봤기에 꽃의 생김새에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당연히 밤꽃의 냄새도 크게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나무를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있던 어느 해 여름 길쭉한 수술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나무를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밤나무 꽃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밤나무는 암수가 한 나무에서 열리는 암수한그루라 자가수정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각 부위마다 시간 차를 두고 꽃을 맺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꽃을 맺고 그만큼 오래 냄새를 내뿜습니다.
가을만 되면 불쾌한 냄새를 유발한다며 민원의 대상이 되는 은행나무(Ginkgo biloba L.). 은행나무 역시 샛노랗게 물을 들일 때나 고약한 열매를 떨어뜨릴 때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다지 유심히 보는 친구는 아닐 겁니다. '은행나무 열매 = 가을'이라는 공식은 제게도 너무 당연한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해 전 봄, 우연히 올려다본 은행나무에 초록색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을 본 이후로는 봄(아기 열매)부터 가을(노랗게 농익은 열매)까지 길게 구경하는 재미를 누리게 됐습니다.
요즘 산책 길에는 목련의 꽃눈이 좋은 구경거리입니다. 초겨울 작고 납작했던 꽃눈이 겨울이 깊어지고 봄이 가까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면 이유 없이 설렙니다.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자연에서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그 감각이 또 다른 탐구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 식물을 다루는 일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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