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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현수 Sep 22. 2020

3. 잘 가꿔진 나무가 비싼 이유

식물을 사는 건 결국 시간을 사는 것




작업한 식물을 처음 판매하기 시작할 때 가격 책정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소비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과 제가 제시하고자 하는 금액 간의 차이가 커서가 아니라 가격 책정 기준 자체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보통의 상품처럼 원가에 몇 배를 받는다는 계산이 쉽지 않았던 것은 식물 디자인 과정의 특성상 원가 대부분이 다름 아닌 저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식물은 작업하는 시간이 길수록 결과물의 깊이도 깊어집니다. 작업 시간이 길었다는 것은 디자이너가 식물의 변화에 반응하고 생장에 개입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가장 긴 작업 시간을 투입한 밀레티아 자포니카 '삿수마'(Millettia japonica 'Satsuma')를 예로 들어볼까요?



밀레티아 자포니카 '삿수마'는 가드닝 공부 초반에 제 손에 온 식물입니다. 약 4년이 되었으니, 네 번의 계절을 벌써 네 번이나 돌았네요. 식물 중에는 같은 환경에서도 겨우 1년에 잎 2-3개를 낼 정도로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한 계절에 잎을 하도 많이 내서 나무의 형태마저 바뀌는 친구도 있습니다. 밀레티아 자포니카 '삿수마'는 후자에 속한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빛과 온도가 적당하다 싶으면 쉬지 않고 잎을 냅니다. 잎이 성장하는 속도도 빨라서, 아침에는 잎눈의 수준이었는데 저녁에 보면 두 개의 여린 잎이 새침하게 나와 있는 일도 흔합니다. 제 식물들은 아예 새로 들여온 식물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는데 생장 속도가 매우 빠른 친구들은  틀을  의미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여기서 틀이란, 일정한 방향에서 볼 때 균형미가 느껴지도록 잎과 줄기의 방향을 잡아두었다는 의미입니다. 식물은 사람에게 예뻐 보이는 곳을 골라 새로운 잎을 내는 게 아니라 자기 계산대로 잎을 내니까 활발히 새잎을 내는 식물은 자연스레 계속 틀을 벗어나고, 그렇기에 저는 지속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밀레티아 자포니카 '삿수마'의 지난 3년 (좌상단부터 2017년 3월 - 2018년 9월 - 2019년 2월, 12월 - 2020년 8월)



 글을 정리하며  3 간의 변화를 살펴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처음 1(2017-2018) 좌측으로 뻗어나간 줄기가 그것대로 멋스러워 보여 두고 보면서 그만의 균형을 찾아갔던  같습니다. 그러다가 잎의 밀집도가 높아진 중간 부분 잎을 다듬고 보니(2019.02) 드러나지 않았던 예쁜 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들의 진행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주는 작업을 거친 (2019.12),  옆으로 뻗은 가지를  벌려주었습니다(2020.08 - 현재).  과정에서 화기와 식물의 균형을 맞추고 새로운 흙으로부터 영양을 공급시켜주고자 화기를 교체했습니다.



가끔 화훼시장에서 선이 예쁜 식물을 만나면 그가 지나왔을 시간을 생각합니다. 잘려 나가고, 새로운 줄기를 길게 뻗다가,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새로운 곳으로 잎을 내고, 꺾이고, 애써 키워온 잎을 떨구고, 새로운 흙을 만나 새 옷을 입은 듯 생기가 넘쳤다가 추위에 떨며 모든 것을 멈추고. 식물 자신과 관리자 둘만 아는 은밀한 시간들이 모인 현재. 잘 가꾸어진 나무 한 그루를 사는 것은 그 은밀한 시간을 통째로 데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작업물에 값을 메기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다년간 시간을 공유해온 식물들은 더더욱 힘든 것 같습니다. '정이 들었다'는 마음보다는 성장해온 과정을 고스란히 다 아는 부모 같은 마음일까요? 누굴 데려와도, 무엇과 비교해도 내 자식이 더 아까운 것 같은 그런 마음이요. 손에서 놔야 새로운 작업이 들어올 거라는 생각으로 하나씩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식물이 자란 만큼, 저 역시 이별에 강한 식물 디자이너로 자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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