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책 한 권 읽기도 벅찬데, 왜 독서하고 대화까지 하러 나오는 거예요?” 오래전, 한 지인이 저에게 툭 던진 질문입니다. 그때는 ‘책이 거기 있고, 사람이 거기 있으니까요’라며 순간적으로 얼버무리듯 답했지만, 그 질문은 제 가슴 속에 끝나지 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그러게요. 어떤 사람들은 대체 왜 책을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굳이 경청하러 오는 걸까요? 시간이 곧 금인 치열한 사회에서 왜 그러는 걸까요. 그 시간에 넷플릭스라도 보며 휴식을 취하던지, 아니면 부업이라도 뛰어서 돈을 더 벌어도 될 텐데요. 놀라운 일은 ‘그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러 오는 사람이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겁니다.
저는 일과시간에 숨가쁘게 일하고, 퇴근 이후에 책 읽고 모임에 오는 평범한 직장인들을 수천 명은 족히 보았습니다. 육아에 지친 와중에 어떻게든 책을 붙들고 정말 짧은 짬을 내어 자리에 나오는 양육자들과 톱니바퀴 같은 스케쥴에 치이면서도 책을 붙들어온 자영업자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교수님, 작가도 아니며 하물며 책 읽는 게 업무인 출판업 종사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기꺼이 인문학 도서를 읽고 사람들과 대화하러 나옵니다.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른바 철인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특정한 공부와 수양을 거친 수호자 계급이 곧 철인왕이 되어 국가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고 보았지요.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제자 격인 아데이만토스는 스승에게 이렇게 되묻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들을 그다지 행복한 사람들로 만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행복은 문맥 상 직접적인 재산과 보상에 가까운 뜻이죠. 즉, 그 모든 수고스러운 공부와 수양에 보상이 없다면, 대체 누가 나라를 위해서 살겠냐는 현실적인 질문을 한 셈이지요.
책을 읽고 작은 광장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은 소크라테스와 제자의 대화와 묘하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문학 책을 읽고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에 물질적인 보상 따윈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로감을 감추며 꾸준히 모임에 참여하는 직장인, 학생, 주부 등 여러 사람이 오늘도 어딘가에 모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우리 공동체의 주권자이자 자기 삶의 주권을 꿈꾸는 가장 평범한 주권자들을 보면 이름 없는 철인왕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저는 출퇴근에 지쳐버린 철인왕들의 나라를 상상하곤 합니다.
돌이켜보면 학생 때부터 대략 20년 가까이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왔습니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와중에도 제 손에서 책은 놓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이들이 더불어 인문학 책으로 대화하는 광경을 수백 번 이상 봐왔습니다. 각자 삶의 경로를 하나의 실선으로 생각해볼까요. 만약 수백 번의 모임이 있었다면, 숨 가쁘게 달려가는 와중에도 이끌리듯 책과 사람을 찾아온 이들이 교차해 가는 광경은 수천, 수만개의 실선으로 짜여진 작품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보통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는 기록되기 어렵다는 걸 압니다. 이제 저는 그 수많은 만남을 떠올리며 손끝에서 활자를 뽑아내어 봅니다.
오랜 기간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책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시로 든 책을 읽지 않아도 글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께 해당 도서를 소개해 줄 수 있다면 영광이라는 마음가짐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이죠. 나아가면 책과 사람을 잇는 건 맥락이 될 겁니다. 가령,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10대의 학생이 읽을 때의 감상과 30대의 사회인이 읽을 때의 감상은 다르겠지요. 삶의 맥락이 다르니까요. 이렇듯 고전을 읽는 평범한 사람들의 맥락을 겨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참, 소크라테스가 제자의 질문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고대의 철학자는 빈곤함이 사람의 기능을 떨어트린다고 인정합니다. 동시에 부유함이 사치 등의 다른 문제도 일으킨다며, 과연 행복을 부와 동일시하는 게 올바른지 되묻죠. 소크라테스의 대답을 축약해보면 이렇습니다. “소수의 지배계층이 ‘행복’하면 그건 ‘행복한 나라’일까?, 우리는 온 나라를 행복하게 하는 올바른 방법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야하네.” 이게 2400여년 전의 대화가 맞나 싶을 정도군요.
고대의 사람들이 질문과 답변을 오가며 대화했듯, 이 글 묶음도 과거의 질문에 대답하는 긴 대답입니다. 예전에 얼버무린 단답에 삶의 맥락이라는 주석을 달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앞서 ‘행복’에 대한 고대의 토론을 잠시 소개했었지요. 제가 보기에 독서와 토론의 향연을 마친 현대의 모임 참가자들의 표정은 묘하게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 제 마음도 푸근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떠올린 여러 생각을 적어 나가다 보면 제 대답도 두터워지겠지요.
어쩌면 하나의 질문이 씨앗이 되어 한 권의 책을 잉태했다고 할 수 있겠군요. 혹시 알아채셨나요? 지금까지 제 글투는 모임에서 대화하는 제 말투와 흡사합니다. 책 읽고 모임을 하듯, 앞으로 펼칠 이야기도 그러할 겁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