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밖이 위험할 때,『변신』
쳇바퀴 도는듯한 출퇴근에 지쳐버려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던 적이 있나요? 월요일이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빌어본 적은요? 그런 사람이라면 카프카의 <변신>에 기꺼이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고단한 퇴근길, 귀가 후 쫀득한 족발에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만찬을 즐기며 힘들었던 하루를 보상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렇다면 이 만찬에 책과 사람을 더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이제 바삭한 독일식 족발을 준비할 때가 왔습니다. 두툼한 소금과 향신료로 밑간한 돼지 다리살을 오븐 용기에 넣고 다리가 적당히 잠길 만큼 흑맥주를 부어줍니다. 금세 흑맥주의 캐러멜 향이 알싸한 향신료와 뒤섞여 존재감을 뽐냅니다. 잘 준비된 고기를 140도로 예열한 오븐에 집어넣고 두어 시간 정도 익힙니다. 속까지 잘 익었다면 마지막은 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강하게 마무리해줍니다. 촉촉한 속살 위에 바삭하고 맛있는 껍질을 만들기 위해서죠. 이렇게 슈바인학세Schweinshaxe 조리가 마무리 단계로 향합니다.
고기 요리가 완성 되었다면 카프카의 <변신> 모임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니, 독서모임에 웬 슈바인학세냐고요? 이번 모임의 테마는 요리와 함께하는 독서모임이기 때문입니다. 테마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문학에 나온 장면을 재현한다. 2. 해당 장면은 요리가 나오는 장면이어야 한다. 3. 주최자는 요리를 준비하고, 참여자는 요리를 먹으며 대화한다. 굳이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참여자는 주최자의 요리 실력에 대해서는 모른척해야한다. 정도가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책을 안 읽은 분은 ‘내가 책에 나오는 요리 이름까지 알아야 해?’, 책을 읽은 분은 ‘어? <변신>에 슈바인학세 같은 요리가 나왔었나?’ 같은 의문입니다. 예. 모두 지당한 생각입니다. 사실 <변신>에는 슈바인학세 같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가족이 하숙생들에게 ‘고기와 감자 요리’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올 뿐입니다.
그러면 왜 슈바인학세냐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이 아닙니다. 질긴 돼지 다리 부위는 100년 전에는 체코나 독일의 부유하지 않던 사람들이 즐겨 먹던 부위였다고 하죠. 그리고 돼지 다리는 감자 요리와 종종 함께 내놓았다고 하더군요.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니 좀 그럴듯한 메뉴 선정 같죠?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프란츠 카프카는 프라하 토박이였으니 독일식 족발인 ‘슈바인학세’보다는 체코식 족발인 ‘꼴레뇨’Koleno가 책 속 고기 요리에 더 가까운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요리지만 어느 쪽에 가까울지 추측하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일단 카프카는 독일어로 글을 썼으니 ‘슈바인학세’라고 칩시다. 고증도 좋지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요.
이렇게 맥락을 이해해 보려는 일은 중요합니다. 또 이해를 위해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한 점도 있습니다. 한국인 입장에서 이 책은 지구 반대편, 100년도 훌쩍 지난 과거의 체코 사람들을 그린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어째서인지 그런 책을 2020년대의 한국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요리까지 준비하며 읽고 모였습니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여기서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하면 이해의 지평이 열리고, 이해가 이루어지면 비로소 공감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제 설명은 상상을 위한 재료였습니다. ‘고기와 감자 요리’로만 표현되던 머나먼 나라의 책 속 광경, 이제 머릿속에 좀 더 잘 그려지지 않나요?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지금 <변신>을 완독하거나 다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돼지 족발 요리’가 놓인 식탁을 상상할 수 있고, ‘바퀴 도는듯한 일상에 지쳐버려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던 경험’에 공감이 가면 충분합니다.
<변신>의 주인공은 어쩐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물론 출근조차 할 수 없죠. 집을 나서야 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는데도 방문조차 지나갈 수 없습니다. 가엾은 주인공은 그만 허둥지둥하고 맙니다. 생활비 걱정도 해야 하고, 빚도 갚아야 하는데 직장을 갈 수 없다뇨. 왜 그럴까요? 벌레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고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신했다니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죠. 아무튼 가족들도 이상하게 여기는 마당에 직장 상사까지 집에 찾아오며 주인공은 더욱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너무 이상한 이야기라 한국에서는 “내가 벌레가 되면 어떡할 거야?”라고 부모님에게 묻는 ‘그레고르 챌린지’가 한 때 유행하곤 했죠. 많은 부모님의 골머리를 썩인 재미난 유행이었습니다. 이 챌린지도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에 유래한 질문이죠. 물론 단순히 이상한 이야기로 소비하기엔 아까운 책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주인공은 벌레가 되어버린 걸까요? 무수한 해석이 있을 수 있으니 그 부분은 각자의 해석에 맡깁니다. 참여자들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의견을 말하고, 들으면서 요리를 먹으며 다양한 해석을 주고 받습니다.
A씨는 한 노래 가사를 들고 옵니다. 내가 도시의 별빛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반딧불이었다며, 노동에 지쳐버린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처량해합니다. B씨는 애초에 모두가 벌레였는데 주인공만 사실을 깨달은 게 아니냐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C씨는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를 인용하며 우리를 벌레로 만드는 사회가 바로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라리는 책상(bureau)이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관료제 사회에서 한 개인이 무력해지고 소외되는 예시로 바로 카프카를 들었지요. 이 해석들을 묶어서 신화학적인 논의로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여백이 부족하니 오늘은 생략합시다. 다음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요.
해석도 좋지만 질문은 더 중요합니다. 모임 참여자들은 가족, 노동, 인간성, 예술 등의 주제로 질문에 질문을 쌓아가며 만찬을 즐깁니다. 읽은 이의 질문이 많다는 건 좋은 책의 조건 중 하나지요. 그런데 질문은 늘 유익한 법이지만 때론 조심해야 합니다. 카프카라는 미궁은 아주 복잡하고 깊거든요. 거기에 질문이라는 등불을 들고 탐험하다 보면 어느새 끝없는 심연에 빠져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물론 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미궁을 탐험하는 일도 필요할 때가 있지만, 지금은 식사도 함께 해야하니 체해버리기 전에 돌아옵시다. 그러므로 이번 모임 기획에서는 만찬이 카프카란 미궁의 안전지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준비한 요리에 주인공의 자리는 없습니다. 벌레가 된 주인공은 방에 갇혀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은 오로지 식탁에 앉아 있는 ‘인간’들의 몫입니다.
이번 <변신> 요리 모임은 책의 내용을 아이러니하게 재현했습니다. 참여자들은 빵과 고기, 음료를 오손도손 즐기며 대화합니다. 그런데 책 내용은 이렇습니다. 따뜻한 저녁 식사 자리, 벌레가 된 주인공만 방에 갇혀 소외된 장면이죠. 모임 장소에서도 의도적으로 방 하나의 문을 닫아놓았습니다. 만찬을 마무리 할 때 즈음, 참여자들은 어떤 가능성을 깨닫습니다.
저 방에 갇힌 벌레는 지쳐버린 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무거운 아침,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쩌면 우리 모두 침대에 나의 일부를 떼어놓고 일터로, 학교로, 육아 현장으로 떠나는 걸지도 모르죠. 하루하루 일에 쫓기는 동안 내가 나를 소외시키고 있었다니,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군요.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상상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상상은 나의 경계를 시험하고 사유를 확장시킵니다. 어디서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일은 두렵습니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일은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자기 소외일지도 모릅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장 마지막으로 식기를 내려놓은 사람이 조심스레 입을 닦습니다.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식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모임도 끝낼 시간입니다. 참여자들은 정다운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닫혀 있는 옆 방 ‘너머’를 잠시 바라보다가 모두 귀갓길에 오릅니다. 좋은 질문을 가지고 떠나길 빕니다. 만찬 이후 남은 설거지는 제 몫입니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청소와 설거지를 마치지 않으면 침대에 들어갈 수 없는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기면 ‘방’이 ‘우리’로 변신해 버리는 무서운 저주죠. 저는 그걸 직장인의 저주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침대 안쪽은 꿈이 기거하는 공간이죠. 푹신한 침대를 고대하며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저도 밤하늘 아래 골목 어딘가로 사라질 겁니다. 그렇게 노동이라는 원죄와 청소라는 저주 너머, 꿈을 향해 오늘도 자리에 듭니다. 부디 벌레가 되는 꿈을 꾸지 않길 빌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