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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남긴 작품들 중 미완성으로 보이는 작품이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노예' 연작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돌을 다듬다가 만 듯한 모습으로 보이는 조각들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듯한 노예의 신체 부분들이 조각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작품들이 미완성된 작품이었다고 여겼으나 최근에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예술가가 이 조각들을 더 다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말한 인간의 정신을 가리키는 듯하다. 돌 속에 갇혀있다 해방되는 조각의 형상이 대리석이라는 물질에서 조각이라는 정신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설명된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조각은 돌 속에 갇혀있는 이데아의 형상을 해방시키는 작업이었으며, 노예 연작은 육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의 고고한 정신, 이데아의 표상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서양의 전통적 철학사에서 정신과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미켈란젤로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신은 항상 육체의 상위에 존재하는 개념이었고, 육체를 넘어서는 지성과 정신력은 논쟁거리조차 없는 진리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근현대에 들어와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몸과 신체에 대한 사유와 시각 역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 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여겨지는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신체' 자체가 사유의 영역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논증했다.
전통적 객관주의적 철학에서는 무언가를 오감을 통해서 지각할 때, 눈은 보는 일을 하고 코는 냄새를 맡고 피부는 촉각을 느끼는 등 각각 따로따로 존재하는 감각들을 주체인 인간이 수용하여 통합적으로 인지함으로써 지각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하나의 감각은 다른 감각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주체를 통해 통일성을 이루지 못한 감각들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그저 불명료한 감각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사물을 지각하지 않는다. 당장 내가 눈앞에 컵을 잡으려고 할 때 내 눈앞에 컵이 있을 때 x 좌표 80, y 좌표 350 위치에 놓여있는 컵의 위치를 인지한 다음 컵을 잡는 행동을 수행하지 않듯 말이다. 사람은 자기 뜻에 맞게 신체부위들을 의식하기 이전에 '선 의식적'으로 통합해 움직일 수 있으며, 우리는 일반적인 사물과 달리 우리의 몸을 우리 스스로와 분리할 수 없다. 이는 스스로가 나를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인간은 특정 시점과 특정 공간에 맞물린 채 존재하며, 이러한 신체는 그 시간과 그 장소에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상황을 지각하는 '현상적 장'이다.
또한 신체는 주체이자 객체가 될 수 있는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질 때 어느 쪽이 지각의 주체이고 어느 쪽이 대상이 되는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주체인 동시에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주체와 세계 사이에서 지각하는 근원적 토대는 '몸'이다. 우리의 신체는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며, 일부인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완벽하게 인지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신체를 통해서만 세계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정신은 눈(시각)과 연결되어 있으며, ‘본다’는 행위 자체가 근본적인 우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시지각은 빛이라는 외부 존재에 공명함으로써 발생한다. 외부 대상인 빛에 물질적인 반응을 하는 시각 기관인 눈이 존재하고,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내가 외부 대상과 감응하면서 이루어진다. 내가 본다 것은 곧 내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지표다. 이 신체의 작용은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에 의해 한계 지어진 것이다. 즉, 본다는 행위는 세계를 가시화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보고 있는 주체인 나를 가시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이는 존재임과 동시에 보는 존재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논증에 따라 메를로퐁티는 그 어떤 철학자 보다도 미술, 그중에서도 회화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1961년 출판된 저서 <눈과 마음>에서 그는 "회화는 '말없는 사유'이고 철학은 '말하는 사유'라고 말했다. 메를로 퐁티는 "화가는 주체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몸을 세계에 빌려주며, 이로써 세계를 회화로 바꾸는 수동적인 존재기도 하다"라고 주장한다. 보이는 존재인 동시에 보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주요한 예시로 제시한 작가 중 한 명이 폴 세잔이었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폴 세잔은 원근법 등의 기법을 의식적으로 빼고 사물의 본질 그 자체를 그림 속에 담고 싶어 한 화가다. 그의 그림의 형태가 불안정하고 일그러져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이성적으로 사유한 이미지를 종합하여 그림을 그렸다. 세잔이 80여 번을 반복하여 그린 ‘생 빅투아르 산’을 보고 메를로퐁티는 “화가가 자신의 응시로서 탐구한 산”이라고 설명한다. 세계를 이루는 일부로서의 세잔이라는 주체가 ‘세계와 만남’을 이룬 순간이 화폭에 담긴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제 몸의 개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살(chair)'개념을 제시한다. 신체나 몸과 같은 단어가 하나의 총체성을 연상시키는 것과 달리 살은 지각하는 몸과 세상이 상호작용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매개를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살’ 개념 그 자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회화’다. 화가는 관찰자로서 세계를 관찰하여 옮기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의 일부로 자신의 살을 세계와 겹쳐 놓은 채 작업한다. 동시에 보는 행위 혹은 응시함으로써 세계에서 분리된다.
메를로퐁티가 언급한 폴 세잔이나 오귀스트 로댕, 파울 클레 등 근대 미술 이후에도 미술은 여전히 철학자의 담론에 기대고 있다. 메를로퐁티의 몸 개념을 가장 직접적인 방법론으로서 사용하는 현대미술 영역 중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행위예술가들이 자신의 ‘신체’를 예술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활용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있어 신체는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자기 탐색과 자기표현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인 도구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행위예술의 대모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죽음과 고통, 존재의 한계를 탐구한다. 작가의 퍼포먼스는 대체로 대중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그녀는 칼로 자신의 손가락 사이를 빠르게 찌르기도 하고(Rhythm 0), 퍼포먼스에 초대된 관객들이 마련된 장미, 가죽, 가위 빵, 총알 한 발이 장전된 총 한발 등 총 72가지의 물건들을 늘어놓고 자신의 신체에 학대와 같은 행위를 가해도 견디는 행위를 6시간이나 지속하기도 했다(Rythm 10).
미니멀리즘 역시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조 중 하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한 미니멀리즘은 당시 유행하던 추상표현주의가 '평면성'을 지향하는 것을 비판하며 탄생하였으나 점차 현상학의 개념들로 분석할 수 있는 작업들이 등장했다. 캔버스를 따라 윤곽선을 그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점, 선, 면의 지극히 단순한 형태만을 남겨두는 미니멀리즘의 작업들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이 단순함 조차도 신체가 그 전체를 즉시 한 번에 인식하지 못한다는 시각적·인지적 한계를 드러낸다. 미국의 개념적 예술작가인 로버트 모리스의 'L-beams'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철제 빔은 단지 그 공간 안에 다른 각도로 놓여있을 뿐이지만 그 위치와 자세에 따라 모양이 달라 보인다. 이성적으로는 똑같은 오브제라고 인지하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물체는 그렇지 않다. 관객은 물러났다 다가갔다 하는 식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 눈앞에 놓인 작품을 지각한다.
미니멀리즘이 고민한 시공간 안에서의 '지각'이나 인지의 문제는 다시 이러한 인지 과정의 산물인 '개념' 자체를 예술로 받아들이는 움직임까지 이어진다. 다소 난해하고 '대체 왜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법한 일들과 결과물들도 현대미술은 당연한 듯 포용하고 있다. 이 이상한 세계를 나의 '몸'과 '살'을 통해 어디까지 유영하고 받아들여 상호작용을 이룰 것인지의 한계점은 역시 결국 주체이자 대상인 '나'의 몫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