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무했던 대학병원은 사회복지차원으로 미혼모 센터와 협력하여 미혼모들의 산부인과 진료와 분만을 지원하던 곳이었다.
일하는 몇 년간 다양한 상황의 미혼모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본인이 임신인지 모르고 있다가 분만직전 복통으로 병원에 실려와 임신을 확인함과 동시에 분만을 진행하는 경우나(대부분 미성년자의 매우 어린 임산부가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경우는 분만 후 미혼모센터에 협력의뢰를 하게 된다.)
임신인 줄은 알았지만 병원 진료를 꾸준히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충분한 검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삭이 다되어 미혼모 센터로 뒤늦게 입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혼모센터에 들어오게 된 사연에는 각자의 다다른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 산모들은 뱃속의 아기를 위해 본인이 출산에 대한 두려움과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아기의 생명을 지켜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시험관 시술을 통해 어렵게 아기를 가지고 또 그 아기를 지키기 위해 고위험산모병동에 몇 개월을 누워만 있는 산모와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진찰도 한번 받지 않다가 분만이 임박해 입원하게 된 미혼모가 한 병동에서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있는 것을 종종 보았던 나는 가끔 마음이 심란하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이브닝 근무로 출근해서 인계를 받으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환자 차트를 열어서 인계 전 환자파악을 하는데 환자 리스트에 처음 보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F/12". 성별을 나타내는 F 옆에 난생처음 보는 숫자 두 자리가 적혀있었다.
"12세? 아니 소아과 병동에 자리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산모병동에 애를 보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장이라도 원무과에 전화할 기세로 데이 근무 차지를 보고 있던 후배 간호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산모 맞아요... 인계드릴 때 말씀드릴게요... 휴..."
내가 잘못 들었나 하며 차트에 적혀있는 이름을 더블클릭해서 아무리 재조회를 해도 이름 옆 '36 wks for IVP...' 적혀있는 주수와 진단명이 변하지 않았다.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나는 인계를 듣는 동안에 한숨을 수도 없이 쉬었던 것 같다.
산모는 만 12세, 예비 중학생. 미혼모센터에 입소한 지는 몇 주 안되었다고 했다.
아마 어린 나이에 덜컥 임신해 버려 겁을 먹고 알아볼 정신도 없이 시간이 흘렀을 터이다.
아기를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미혼모센터에 입소하여 분만하고 아기는 해외로 입양을 갈 예정이었다.
진통실 4자리 중 다른 진통하는 산모는 없었고 그 산모 혼자 병실을 쓰고 있었다. 인계가 끝나고 첫 라운딩을 가야 하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십 번 한숨 쉬던 끝에 용기를 내어 진통실 문을 열었다.
커튼을 천천히 열어젖히자 배에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 고통에 아파하는 산모가 있었다. 누워있는 상태에 이불까지 덮고 있어서 그런지 보통의 산모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고 나는 마주하기 전 겁먹었던 것이 무색하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의 진통이 지나고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다.
다른 평소의 분만들과 다르게 아기의 탄생을 기뻐하는 가족이나 남편은 찾아볼 수 없는 어쩐지 쓸쓸하고 조용한 분만이었다.
분만 후 일반 병실로 옮기기 위해 진통실에서 걸어 나오는 산모를 다시 마주했을 때 그제야 자그마한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분만한 지 2시간도 되지 않아 침대에 앉아 친구와 통화하며 으레 열두 살짜리들처럼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와 젤리를 늘어놓고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이 분만이 12살 어린 산모가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었을지, 이 어린아이에게 뱃속 아기를 지키자며 종용한 어른들이 정말 옳은 것일까?... 생각이 많아졌다.
대학생 때는 미혼모, 낙태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봤었지만 뉴스에서 보여주는 자극적인 기사들로 부정적인 감정만 있었을 뿐 현실에서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굳이 더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아직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미성년자의 아이를 방치한 아이의 부모의 탓도 매우 크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부모 밑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크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그저 아이들 각각의 부모의 탓으로 돌려버린다면 그 일면에 관리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또 다른 아이들 또한 분명 생긴다.
또한 아직까지도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성에 대한 폐쇄적인 생각들과 성에 관해 가지게 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호기심마저도 부끄럽고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올바른 교육의 전달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미루고 외면하다 보면 12살짜리도 부모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나는 분만실에서 근무하는 6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미성년자 임산부를 보았고 그들이 낳은 아기들이 부모 없이 멀리 입양 보내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아기를 낳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내면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될까?
그게 아니라면 태어난 아기를 위해 그 어린 미성년자에게 부모가 되어 아기를 책임지라고 얘기할 수는 있는 걸까?
임신한 산모의 인생도 중요하고 그 뱃속에 자리 잡은 아기의 생명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는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이미 임신해 버린 어린 임산부들을 탓하거나 또는 그 임산부의 인생을 위해 낙태를 합법화하자고 한다.
하지만 태아를 몇 주 이전에는 생명으로 볼 수 없느니 몇 주가 지나면 살인으로 봐야 하느니 그딴 얘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보다 더 앞서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바꿔야 할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서로 미루며 누구의 탓을 할지 고민하는 이 시간에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겪지 않을 수 있었을 고통과 과정을 겪고 있다.
적어도 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나가고 있는 어른이라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 안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 쉽게 해결되지 않을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책임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이 글을 적어내고 올리기까지 사실 몇 개월간의 고민을 거쳤다.
이런 일들을 옆에서 목격하고 지켜본 나조차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데 내가 과연 이런 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누군가에게 이런 고민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몇 명이라도 나의 글을 읽고 이런 상황을 알게 되고 조금이나마 생각해 준다면,
또 이런 생각들이 쌓여 아주 작은 변화라도 생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글을 올릴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용기를 내었다.
나 또한 누군가를 돕는 일에 마음을 두고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만큼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열두 살의 그 어린 산모의 얼굴과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