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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잎 Aug 20. 2024

간호사, 활활 태워지다

장작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간호사'라는 직업을 생각할 때에는 '태움'이라는 단어가 항상 함께 떠오른다. 


**태움 :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괴롭힘 등으로 길들이는 규율을 지칭하는 용어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 사이에는 '태움'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의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복잡한 관계가 얽혀있다고 해명하고 싶긴 하지만, 결국 나 또한 이 태움을 직접 목격하고 또 조금은 타보기도 했던 한 명의 간호사이다. 


 간호학과 학생 때 실습하면서 보았던 태움은 꽤나 엄청나고 종류도 참 다양했지만 언급하기엔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이기 때문에 일일이 나열하고 싶진 않다. 


 운이 좋게도 내가 입사해서 6년간 쭉 일했었던 분만실은 내가 학생일 때 봤던 태움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물론 간호학생들도 함께 있는 공간에서 일부러 실수를 지적하며 크게 떠벌리거나, 질문에 대답을 못하면 자기들끼리 눈 마주치고 깔깔거리며 비웃거나 등등 으레 신규간호사라면 겪는 것들은 당연히 겪어보긴 했지만 뉴스에 나오는 수준의 어마어마한 태움을 겪어보진 않았다.


 그럼에도 처음 몇 개월간은 출근할 때마다 차에 치이고 싶다던가, 죽지 않을 정도로 다치고 싶다던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 프리셉터는 내가 괴로워하는 포인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 프리셉터 : 간호사는 입사하여 근무부서를 배정받게 되면 8주간 프리셉터(경력)-프리셉티(신규) 관계로 선배 간호사와 짝꿍이 되어 함께 근무를 하며 일을 배우게 된다.


 인신공격 같은 그런 유치한 방법은 전혀 쓰지 않았다. 간호사로서의 나의 신념이나 마음가짐을 툭툭 건들며 자아비판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 간호사가 되었는데 내가 환자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출근이 마치 죄를 지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내 프리셉터는 8주간의 교육으로 내게 매사에 눈치 보는 소심한 태도와 저 아래까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선사해 준 엄청나게 엄하며 매우 매우 똑똑한 선배님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프리셉티를 혼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간호사는 없을 것이다. 다들 내가 프리셉터가 되면 절대 화내지 않고 차근차근 친절하게 몇 번이고 알려줄 거야. 생각하지만, 급박하게 흘러가는 업무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응급상황으로 하루하루 절여지다 보면 어느새 신규를 쥐 잡듯이 잡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고난의 신규 간호사 시절을 지나 일한 지 만 3년이 되었을 무렵, 나도 프리셉터가 되었다. 


 나는 내 프리셉티를 내가 배웠던 딱 그 정반대 방법으로 가르쳐보겠다고 다짐했다. 딱딱한 말투, 무서운 표정, 사정없이 내리꽂는 비난 없이 가르쳐도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2021년 3월, 처음 만난 나의 프리셉티는 똑똑하고 성실한 후배 간호사였다. 그러면서도 당당하고 나처럼 쓸데없이 기죽지 않는 그런 아이였다. 나는 내 프리셉티의 이런 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선배님들은 신규간호사는 무조건 혼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사람들처럼 프리셉티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나를 매번 지적했다. 


 나는 아직 교육받는 기간인데 왜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고 가끔 실수를 하거나 가르친 것을 잊어버리더라도 옆에서 미리 캐치하고 교육하는 것이 프리셉터이기 때문에 그럴 때는 오히려 내가 부족해서 놓친 것 같아 미안했다.


 물론 선배님들도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근무하며 쌓은 선배님들만의 노하우를 내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봐왔던, 내가 당해봤던 그들의 가르침의 방식이 괴롭힘이라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닌 신규 간호사를 위하는 진심 어린 마음에 열정적으로 행하는 교육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나의 눈에는 조금 거칠어 보였을지라도.


 어쨌든 선배님들도 내가 신규를 잘 키워내길 바라는 좋은 마음에 얘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도 프리셉터 기간 8주간은 내가 오롯이 맡아 가르치는 것이니 그 기간만큼은 나를 존중해서 조금 기다려 달라고 마음속으로는 백 번도 더 외쳤다.


 결국 내가 본인들 뜻대로 해주지 않으니 선배님들은 나에게 8주만 지나 봐라, 독립하면 어떻게 하는지 볼 거다, 일 제대로 못하면 다 잘못 가르친 네 잘못인 거다 등등 거의 반 협박(?) 수준의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렇게 궂은 과정을 씩씩하게 버티고 잘 해낸 내 프리셉티는 분만실의 핵심인력으로 현재까지도 큰 사고 한 번 없이 분만실 업무를 매우 능숙히 잘 해내고 있다.


 물론 나도 프리셉터 기간이 끝나고 한 해 한 해 경력이 쌓일수록 그때 이렇게 알려줬다면 더 좋았겠다, 이런 대화법은 오히려 부담이 되었겠구나 하며 뒤늦게 깨달았던 것도 정말 많았고 그 부족했던 모습들이 후회되어 이불킥을 했던 적도 수도 없이 많았다. 선배님들이 틀렸고 내 방법이 옳다고 말하려는 게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겨우 6년 조금 넘게 일했고, 게다가 내가 직접 가르쳤던 프리셉티는 단 한 명이었다. 감사하게도 나의 프리셉티가 똑똑하고 성실했기에 오히려 그런 프리셉티를 만날 수 있었던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항상 생각한다.


 내가 선배님들처럼 10년, 20년 이상 일했다면, 그리고 여러 명의 신규간호사를 직접 가르쳐봤다면 그 선배님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태움'은 엄연히 다른 맥락이다.


 병원에서 가장 경직되어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간호사 세계에 새롭게 발을 들인 신입들은 어떻게 하면 이 단단한 벽을 넘어 들어가서 그들의 일원이 되어 어우러질 수 있을지 시작부터 막막할 것이다. 


 하물며 "태움"이라는 엄청난 간판을 달고 있는 이 어마무시한 벽 앞에서 머리에 흰 끈 동여매고 활활 타는 장작이 되어보겠노라 용기 내어 뛰어드는 신규 간호사들에게 다정한 격려나 조언이 아니라 도리어 횃불을 들고 내쫓는 꼴이라니. 이게 내가 정당한 가르침과 지적이 아닌 무지성으로 행하는 태움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힘겨운 4년간의 간호학 공부를 끝마치고 사회에 뛰어드는 어린 새싹들을 시작부터 무정하게 불태워버릴 것이 아니라, 곧게 뻗은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우리가 오래도록 존경받을 수 있는 선배 간호사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커버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Henry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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