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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Jun 17. 2021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시런까지

인상에 대해서 심심찮게 보게 되는 문장이 있다.

관상이 과학이다란 말과,

나이 마흔을 넘으면 자기 얼굴책임을 져야 한다

(Every man over forty is responsible for his face)

말인데, 전자는 화제가 된 뉴스에 해당 관련자

사진이 게재됐을 때 댓글로 많이 쓰이는 듯하고

후자는 링컨의 말이라고 하는데 마흔까지

쌓아온 덕망이나 인생 풍파가 얼굴에 남아서

일견 맞는 말 같기도 하면서,

깔끔하고 우아한

인상에 뒤통수를 맞게 되면 또 아닌 말 같기도 하다.

인상 보고 직감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일 텐데,

나로선 지 않게 느껴진다. 관상 관련 만화들을 보아도

결국 잘 생기고 이쁜 사람이 관상이

좋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목구비 뚜렷하고 비율 잘 맞고 안색 밝은 이.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외모를 뛰어넘는

강한 매력이 느껴지는 이들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르다.

관상을 공부하면 아마 또 다른 깊은 진리가 있겠지만,

내 경우엔 범박한 경험치로 인상을 파악하는 것 같다.

편견을 줄이려고 해도

세월이 쌓이다 보니

과거 좋아했던 이들의 인상을 닮으면

방어벽이 허물어지고

과거 싫어했던 이들의 인상을 닮으면

조금 꺼려지게 되니,

결국 경험의 축적치가 주요 자료가 돼버렸다.

즉흥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요새 전시 중인

'시대의 얼굴'을 보면서

또 인상 근거의 중요 데이터를 발견했는데

직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직업이 곧장 외모와

연결되지 않는 약간의 신비주의랄까,

그런 게 어릴 적엔 좋아 보이긴 했는데,

얼굴 전시를 보는데 너무 얼굴들이

자기 직업과 연관돼 놀랐다.

탐험가의 강건함, 비틀즈의 재기 발랄한 자유,

에드 시런의 애수, 뉴턴의 집념을 담은 얼굴들...

베컴의 외모는 축구와 관계없는 듯도 싶지만,

혹독한 신체훈련과 승부를 지나온 사람의 쿨한

표정은 또 일과 관계된 듯도 했다.

조셉 뱅크스, 18~19세기 식물학자이자 탐험가. 지구본과 편지 디테일. 편지에 적힌 문구는 "내일 다시 광활한 바다로 떠나라"라고 한다. 로마시인 호라티우스 싯구


<시대의 얼굴, 세익스피어에서 에드시런>까지는

8.15 광복절까지 국박 특별전시실에서 한다.

대한제국기부터 조선시대를 거슬러 지나는 방을 주욱 따라가면,

해당 장소가 나온다. 얼굴 전시는 유료고 우리나라

문화재 전시는 무료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국박에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해주었는데 잠시 국박? 멈칫했다가

그게 국립박물관의 준말인지 알아채고는

이 단어가 너무나 박력있게 다가와

좋았던 느낌이 있다. 사람마다 자기 직업 분야나

관심 분야에선 쉽게 줄임말을 쓰는데,

국박도 그 중 하나인 듯했다.

예전에 예당 갈래요? 라는 문자를 보고서

예당 음반사에 가자는 말인 줄 받아들였다가

예술의 전당 줄임말인 걸 알아채곤

흥미롭게 다가온 사적 에피소드와도 겹친다.)

해당 전시는 5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1. 명성, 세상에 떨친 이름

2. 권력, 세상을 움직이는 힘

3. 사랑과 상실

4. 혁신, 진화하는 초상화

5. 정체성과 자화상

이렇게 섹션이 나뉘어 있고

방을 따라 걷다보면 차례대로 볼 수 있다.

매표소 외벽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표는 그의 신하
전시실 입구 세익스피어

가장 끌린 방은 자화상 방이었

작가 자매인 브론테 집안 여성들 그림 재밌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 잔뜩 득해

이 가족은 정말 얼굴부터 뭔가 이야깃거리를

많이 담아둔 얼굴 살았구나 싶었다.

나도 세계문학을 폭풍의 언덕과 제인에어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자매들이 썼던 소설을 읽으며

새벽녘 설명할 수 없는 스산한 기분을

십대 때 느끼곤 했는데 그들 표정이

그런 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앤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데이비드 호크니 자화상 2005

그리고 짙고 푸른 청색 계열의 색감을

두드러지게 쓰는 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는 자신의 자화상

역시 푸른 신발과 물감, 바닥, 벽면 등을 써서

너무 자기 그림 그 자체여서 놀랐다.

자화상 그림 작가로 명성을 쌓았다는

조슈아 레이놀즈는 눈이 너무 예리하게

느껴지고 전체 인상이 꼼꼼해 보여

저 얼굴로 타인의 인상착의를 계속

잡아내는 일을 했겠구나 싶어 신기했다.


명성이나 권력 파트에서는 유명인 얼굴을

연달아 많이 볼 수 있는데,

미술공예운동의 창시자 윌리엄 모리스

얼굴이 너무 예수스러워 놀랐는데,

같이 본 이는 역시 목수 인상이라며 함께 놀라워했다.

예수의 직업이 목수이니,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며 바라봤다.

윌리엄 모리스


찰스디킨스의 얼굴이 너무 잘 생겨 놀랐고

당대 인기인다웠다.

디킨스는 머리도 길게 기르고 정장을

입는 걸 좋아했고 배우처럼 사랑받는

삶을 살았다. 세상을 떠났을 때 국민장을 치를 정도였고

독자들은 그를 잃고 상심에 잠겼다.

그의 생전 인상을 초상화로 접했다.

다정다감하고 곱상한 얼굴이다.


이번에 전시를 보며 새롭게 알게 된

17,18세기 옛날 여배우의 얼굴들도 너무 아름다웠다.

희극 배우 넬 귄, 1680년 경
인기 비극 배우, 세라 시든스 1787 초상화

전시실에서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데,

하나 둘 담다보니 너무 많이 담게 되어

뒷방으로 갈수록 자제했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를 비롯, 입구 쪽 인물은

거의 다 찍었고 퇴장문으로 갈수록 수가 줄었다.

전시는 76명의 초상화와 함께

인물 설명을 달아 놓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단편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줬다.

어르신들과 중년들을 위해 활자체를 크게 한

도록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세심한 배려.

전시 초상화나 초기 사진들은

영국 국립초상화 미술관이 갖고 있는 작품들였고

전시 출입문 주변에 국립초상화 미술관의

기념품들도 판매하고 있었다.

퇴장하는 길에는 자신의 초상화를 찍어 볼 수 있게

거울 앞 셀피 모드와

의자 앞 피사체 모드를 두 가지로 해놓아,

관람객들이 자기 경험으로 남기고 나갈 수 있게 해뒀다.

전시장 안 의자에서 관련 책들도 볼 수 있다.

퇴장 시간 즈음에 맞춰 가서 박물관이

문 닫는 시간에 초상화들을 보았는데,

수많은 얼굴을 한 시간 가량 들여다 보다가

밖으로 나오자 마자

일제히 다같이 국립박물관을 함께 퇴장하고,

문화재 방들의 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자동으로 스르르 쾅

닫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연의 장면 전환처럼 느껴졌다.

특별 전시관 밖 고려시대 경천사지10층 석탑을

바라보다 퇴장 안내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박물관에 다니는

취미가 생겨서 넋놓고 옛날 탑을 보거나

지도를 보는 시간을 좋아하게 됐는데,

이 날은 옛날 얼굴들만 보았다.

물론 현 시대 얼굴 사진 보는 것도 좋아한다.

가령 사진 기자들이 찍은 인물 사진들.

한때의 인생 감정이 묻어나는 얼굴들...

영국초상화미술관과 콜라보한 전시장에선

때론 그 얼굴이 여왕이기도 했고

신하, 노예이기도 했는데,

다들 기품이 있었다.

아마 그림의 모델이 된 그 순간에는,

또 한편으론 직업도 직업이지만

외부적인 속박으로부터 떠나 오로지

고요하게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유바 슐레이만 디알로, 노예무역의 생존자.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펴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이 이렇게 전시장에서

사진 한 장과

몇 줄로 요약되는 걸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묵묵히 살다 보니

직업적 완성을 이루기도 했고

삶의 중도에서 만난 초상화가 자신을 설명하는

결정적 근거로 남기도 했다.

앨리스의 작가 루이 캐럴이 남겨 둔

앨리스 모델 사진은. 그런 면에서

내겐 감동으로 남기도 했다.

앨리스 리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감을 준 소녀

이후 작업의 향로를 촉발시킨 사진 하나.

결국 앨리스 완성본이 되었다.

그들이 작업하던 찰나의 시간,

그게 긴 시간을 흘러 이촌동에서,

서빙고로 137에서, 타인을 마주해 감흥을 건넸다.



전시 피사체들은 적어도 인상에 혹은 얼굴에 책임을

진 자일 것인데, 나도 조금 더 진심으로 살아

나의 얼을 담는 얼굴을 만들어가고 싶어졌다.

얼굴만 가득한 방.

보라색 벽면이 아름다웠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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