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zzy Jun 28. 2021

인터뷰

타인을 거쳐 나를 바라보는 일

최근에 인터뷰를 기반으로 작업한,

어느 미술작가의 전시작을 보

현실이 창작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오묘한 느낌을 가졌는데,

그게 얘기를 자신의 얘기처럼

대할 때 그 거리에서 생기는, 

멜랑콜리한 상념 때문인 듯 했습니다.


과거를 회상할 때 일정 정도 미화되기 마련이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조차도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신의 지금 어떤 부분을

떠올는 시간 추적의 발화점이 되기도 하고,

인터뷰를 수락했다는 것 자체가

사적 경험어느 부분을 내놓아도 된다는

솔직함이 작용했을 터이므로,

인터뷰를 작품화하는 작가에게도

각각의 코멘터리는

한 인간의 내밀한 이야기지만

우리라고 이름 붙여도 되는 보편적인 소재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뷰 기반의 예술 작품들을 좋아하다 보니,

실제 살아있는 이야기가 또다른 역동적인 작품

안으로 흘러들어가 다른 이들과 공유되는

작품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살펴 보곤 합니다.

그리곤

어김없이

저의 인터뷰 경험을 떠올려 보 됩니다.


인터뷰를 하는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을 파악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인터뷰 글쓰기 업무인 이들,

단시간에 상대에 대한

인상을 파악하고 그에 어울리는 카피를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립니다.

그에 어울리는 한 문장, 첫 문장을 계속 찾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맘대로 사람을 파악하게 되어,

이젠 반대로 타인을 예단하는 습관을 버리고자 애씁니다.

티브이나 라디오, 서적, 영화 등 대중매체를 보면서도

끝없이 저이는 이런 사람이겠지,

저런 사람이겠지 넘겨짚듯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 생각을 거꾸로 돌려 놓

있는 그대로 보아보려, 노력합니다.

노력한다는 뜻은 반대로

그대로 아닌 다르게 보는 습성을 여전히 은연중 갖고 있다는 거겠지요.


입장을 바꿔놓고 떠올려 보아도, 누군가 나를

몇 분이나 몇 시간 안에 어떤 사람,

몇 문장으로 가두거나

비슷한 어떤 성격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린다면 유쾌하지 않은 일일 수 있으니까요.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하는 습관을

지우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타인을 타인에게 전달한다는 게 불가능하겠지요.

결국 시선과 판단의 적정선을 지키는 것이

인터뷰를 하는 이들의 소명일 테고

나와 나 아닌 자로 시선을 분리해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내가 딱히 궁금하지 않은 이를 만날 때도

저이를 궁금해하는 누군가로 자동 빙의되는

시간을 겪기도 하고,

싫은 인상이라도 내색하지 않아야 하며

너무 좋은 인상이라

과히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되겠죠.


저는 인터뷰를 통해 타인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기도 하고 물들기도 터라,

지금껏 해온 일을 정리해보자는 생각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이 인터뷰였습니다.


인터뷰를 처음에 할 때는 무턱대고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 했고

조금 지나서는 인터뷰라기보다는

사적 만남처럼 좀 더 친밀한 분위기를 가져보고자

노력했고 또 좀 이후로는 냉담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연습을 했니다.

천직이란 생각과 그저 일일 뿐이라는

냉온탕을 오가는 느낌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인터뷰 무크지를 만들어 보

인터뷰 자체에 얽힌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요사이 각이 스물스물 생기면서,

지난 인터뷰에 대한 일적 관점을

정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대상과 사건에 따라 태도는 달라지겠지만,

인터뷰에 대한 관점을 정리하면

나의 범박한 성향이라든가 내밀한 인간관계

대한 것들도 스스로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인터뷰를 점검하고 싶어졌죠.


인터뷰에서 가장 낙담했던 순간, 아니 초연해졌던

시기랄까요. 어느 정도의 달관은

이십대 후반에 삼십대 중반 사이

겪었니다.

처음엔 무조건 잘하려던 것에서

더 잘하고 싶다에서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로 건너갔고

또 어느 산을 넘어야 할 단계인 것 같은데,

정체되었습니다.


학생기자로 시작해,

신문사와 잡지사의 취재 기자,

프리랜서 인터뷰어 등의 일을 하면서 수차례

낯선 이들을 만났고

새로운 만남을 좋아하던 덕분에

만남 자체에는

그렇게 어려운 감정 소모는 없었으나

대답을 듣는 데에는

너무 난감하거나 불편한 상황,

수치스러운 상황 등을 경험했고

뿌듯하거나 감동적이고 설레는 기분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새인가,

사람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것, 

극히 일부분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단계 건너 왔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다, 결코 판단할 수 없으며

판단하였더라도 그건 나의 시각이고,

또 내 경험과 어울려 재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시니컬한 감정을 가질 때쯤

저는 인터뷰를 쉬었습니다.


그런데 좀 신기했던 건

인터뷰가 결국 나를 위해 좋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인터뷰에 대한 사적 편견을 없애려 해도

결국 미래 시점에선 타인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자리로 회상되았습니다.


누군가를 인터뷰했던 자리들이

기억 속에서,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 질문이 나왔고,

상대의 이러이러한 대답 덕분에 혹은 탓에,

나는 이러저러한 영향을 받았으며

어떤 것들은 기억에 남고 어떤 것들은 사라졌다

결국 ''로 환원되었습니다.

유난히 나밖에 모르는 성격 탓인가? 기적인가?

떠올려 보기도 했는데,

사실 인터뷰는 그 순간엔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느라 굉장히 타인 지향적인 일입니다.

저는 말버릇 중에 아!라는 여음을 너무 많이 쓰는데,

이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함께 일하는 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요,

그 아~가

인터뷰의 직업 병까진 아니고, 어쩌다 보니

터득한 직업 매너였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이해했을 땐 아~가 자연스럽게 나와요.

사실 겉과 속이 똑같아 빈 말은 못하는 성격이라

모르는 말이나 반대되는 의견이 나오면

되묻는 성격이지, 아! 여음을 쓰진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를 좀 고쳐보려고 했는데

아주 쉽게 사라지진 않더군요.

오래도록 몸에 익은 말버릇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현재형에선 타인 지향,

과거 회상과 미래시점에선

자기 지향적인 게,

제겐 인터뷰였습니다.


인터뷰를 작업화한 작가를 보면서

그는 자기 지향이 아니라

관극 지향으로 바꾼 데 대해 감탄했습니다.


저도 언제까지나 제 세계 안에 갇혀서

자기중심적으로 인터뷰를 바라볼 순 없다고 생각했죠.

좀 더 시야를 넓혀

다른 지점에서 발화될 수 있는

면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다달았습니다.


가깝게는 글일 테지만,

더 나은 인터뷰, 더 절실하고 유익한

인터뷰는 무엇일까,

영상 전시를 보다 든 고민이었고,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 계속


이상 인터뷰을 좋아하는 어느 인터뷰어의 사견이었습니다.


토탈미술관,  파고다 공원에서 만난 노인 인터뷰, 뉴욕과 이사에 얽힌 사람들 사연과 작품을 들여다보던 시간. 정연두 전시.
인터뷰와 평행 배치돼 극을 관람하듯 다른 사람 얘길 듣고 있는 영상 속 사람들. 전시장을 전시장 위층 계단 창문에서 찍은 사진.
토탈미술관 포커스온 시리즈 2번째, 목요일 세션
작가의 이전글 덤벨은 만능이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