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청년기 통틀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였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소울메이트를 만나려던 것이기도 하고. 이건 사제지간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혈연사이도 아닌, 굉장히 특별한 어떤 대상이다. 왜 그렇게 친구라는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좋아하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랬고, 드라마나 문학작품, 영화, 공연 등 여러 예술 매체를 좋아하면서 더 그렇게 됐다. 그게 인간이 만들어낸 매체이고, 그 안에 우정이나 의리, 특별한 관계들이 이상화되어 있어 그랬던 것도 같다. 그렇게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또 반대로 친구를 좋아하니 창작품들을 좋아하기도 하는 반복 사이클이 형성됐다. 뭐가 먼저라고 말하기 어렵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직 닿지 않은, 어쩌면 모르는 문장들로 공유되는 친구를 만나는 활동일 수도 있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만나지 않은 이와 대화하는 느낌이다. 가끔은 글을 쓰면서 함께 나눌 사람이 없으면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은 독백이라고만 하지만, 매체에 글 쓰는 게 습관이자 직업이었던 나는, 타인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남을 위했으나 결국 내게도 위로가 되던 일, 그게 글쓰기였다. 집 안에 있는 수많은 책과 잡지, 자료들을 버리다 어릴 적 후배들에게 썼던 글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문집 만드는 학생들에게 연락이 와서, 후배들을 위한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기억에서 완전 잊힌 사건이었는데, 글을 읽다가 독서실에 앉아 쓰고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문집에는 두 장에 걸쳐 내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후배들에게 지금을 즐겁게 지내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우린 합창대회, 체육대회의 드센 열기를 아는 사이이고, 학교 사격부나 마룻바닥이 있던 무용실, 교문 옆 공작새에 자부심을 느끼던 시절을 공유하고 있다며, 온갖 설레발을 떨어놓았다. 진심 좋아했던 것들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친구들이 몹시 좋았던 때다. 학교에 가면 몇몇 후배들은 에이스를 휴지로 포장해서 건네거나 이런저런 과자나 편지, 엽서를 건네곤 했다. 동년배 친구들은 고등학교 시절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는 내게, 동네에서 같이 고등학교에 다니자고 설득하기도 했다. 회장 선거 출마를 접었더니, 선거운동을 해주겠다며 몇몇 친구들이 찾아와 나가라고 그랬다. 3년 내내 이름보다 반장으로 더 많이 불렸다.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들쳐보다, 그토록 친구를 좋아했던 순수한 마음이나, 서로 도와주던 어릴 적 친구들이 그리워졌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요사이 직장에서 나이 차 많이 나는 직원들이 가끔 간식을 건네주거나 진심 어린 어떤 말들을 가식없이 다가와 해줄 때가 있다. 순간 교생과 제자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나 어릴 적' 10대 때 교정이 떠오른다. 더더군다나 대화가 별로 중시되지 않는 조직에서 일하고, 각자 개인주의적으로 일하는 분위기가 더 강하다보니 가끔씩 먼저 다가오는 나이 어린 직원들이 되게 귀엽다. 오늘도 초과 시간 넘겨 가며 인수 인계서 쓰고 파일 정리를 하느라 피곤하던 찰나에, 옆 사무실에 있던 90년대 중반 직원이 메신저가 켜져 있는 걸 보고 찾아왔다. 박카스 젤리와 에너지바를 받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고, 배고프던 찰나 두 개 다 단숨이 해치웠다. 너무 맛있었다. ^^
요사이 사무직으로 앉아서만 일하다보니 일하고 돌아오면 홀로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렇게 쌓인 생각은 그냥 휘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얼마나 나를 지치게 하는가를 알았다. 발산되거나 표현하지 않은 채 꺼지는 단상들은 피로가 된다. 사람 사이 에너지로 교류하고 그 생각의 통로를 만들고 연결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그 와중에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을 만나면 인간적 우정을 새삼 느끼고 순간 행복해진다. 나도 어릴 때처럼 흔쾌히 다가가는 법을 익히고 싶은데,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 소극적이 된다. 10대 때의 열정만큼은 아니더라도,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진정한 우정을 맺고 싶다. 결국 우정도 소통을 위한 것일 테고, 소통을 위해 글을 쓰든 읽든 하는 게 아닐까. 소통이 사라지면 글이 사라지고, 그렇게 글글거리며 골골대다 보면, 금세 우울의 늪으로 빠진다. 이 늪에서 탈출해야 한다. 90년대 중반 직원의 호의로 그 시절 우정에 관한 노래를 밤에 듣게 됐다. 신성우가 <친구라 말할 수 있는 건>, 편한 느낌과 믿음, 오해가 없는 것, 나를 반추하게 하는 것 ... 그렇게 4요소다. ^^
나의 친구는? 나 역시 함께 있으면 편안한 느낌, 솔직한 말과 행동에 나를 자연스레 인정하게 만드는 것, 가수이자 이 노래 작사가 신성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릴 적 친구들에게 편지 쓸 때 자주 인용하던 노래인데, 지금 들어도 똑같다. 멜로디도 신성우 로커 목소리도 다 좋다.
친구란 역시 고전같은 대상. 너무 좋은 친구에겐 '해묵은 욕심' 따위는 없어지더라. 진정한 친구란 먼저 다가와 주겠지라든가, 날 알아서 챙겨주겠지, 그런 계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 관계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신기하게도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너무 자연스럽게 함께 흘러가는 이들도 있다. 어느날 꿈속에서 한 친구는 내게 '가족같은 친구야'라고 날 소개했다가 '아니 가족이라 할 수 있지.'라고 정정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고 보면, 장단점이 가까이에서 모두 노출되어도 기꺼이 감내해주는 관계가 친구라 생각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