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윤종신 2025년 수원 콘서트를 다녀왔다.
친구가 내게 본진의 음악을 듣고 왔구나라고 말했다.
본진? 본진의 단어 뜻을 몰라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사전 한자어로는 지휘자가 있는 군영인 본영(本營), 본진(本陣)을
일컫는 말이지만, 덕질 용어에서는 '가장 주력해서 덕질하는 작품,
대상, 분야'를 일컫고 유사어로는 '최애'가 있었다.
그렇구나. 나의 최애 음악을 듣고 왔구나!
전국투어의 첫날이었다.
가급적 개인사가 생기지 않는 이상, 그 투어를 모두 따라 돌 생각이었다.
그러다 개인사가 너무 잦다는 걸 느끼면서
내가 '어른'이구나 싶었다.
학생 때는 다 보고 싶어도 콘서트 티켓이 부담스러웠고,
이젠 나의 최애에는 출혈도 가능하다 여길 때는 이제 시간이 안 맞는다.
그래도 4-6월 일정 중 달마다 가야지 하면서,
일정표를 짰다. 전국 투어 지방에 가면, 그 부근에서 갈만한
여행지까지 짜고 KT나 SRT를 이용할 경우 공연장까지의 시간,
시외버스 터미널을 이용할 시 동선 등
이것저것 체크하며 시간을 썼다.
이런 게 '덕질'인가.
수원 콘서트는 이번 콘서트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예상하고
미리 경험하는 자리였다. 서울편을 먼저 끊고 수원편을 끊었기에
시야가 좋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경기아트센터 극장이 워낙 잘돼 있어서
공연을 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특히나 다채로운 고퀄의 무대조명은
윤종신 퍼포먼스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려줬다.
푸른색, 보라색 빛의 향연.
늘 그랬듯이 가사가 뛰어난 가수의 특성상,
가사들을 영상으로 쏴주었는데 몰입도가 높았다.
'그때'라는 타이틀에 맞게,
추억을 마음껏 회상할 수 있는 자리였다.
윤종신이 생각하는 '그때'를 노래별로 소챕터를 짜서,
연이어 3-4곡씩을 한번에 소화해줬는데
어릴 적 테이프나 CD 들을 때 연거푸 안 끊어 듣고
내내 듣던 그런 기분이었다.
좋니, 애니, 나이, 너의 결혼식, 오래 전 그날 등
20세기~21세기 유행가라든가
처음 만날 때처럼, 텅빈 거리에서(공일오비)라든가
90년도, 91년도 데뷔곡은 물론이고,
보고 싶어서(Rainy version), 잘했어요, 말꼬리 등의
고퀄 찌질 곡들도 다 불러주었다.
게다가 11집(2008) 수록곡을 내일 할 일, 동네 한 바퀴, 야경 등
세 곡이나! 가장 놀랐던 건 싸이 시절 열심히 대문에 도토리 까서
사서 듣던 '보고 싶어서'가 있던 거다.
https://youtu.be/--xXnhfbZwA?si=G0r2kF1zV6niKUnn
이 앨범이 2001년에 나왔는데,
의외로 주목받았으면 하는 곡들이 좀 묻혀서
아쉬웠던 경험이 있다.
그늘 앨범 공연을 대학로에서 봤던 거 같다.
문득 공연을 보는데 2000년대 초반 청량한 분위기 곡들로
구성된 앨범 콘서트가 떠올랐다.
보고 싶어서는 노래 구성 중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곡이었는데,
그냥 버전과 비오는 날 버전이 있는데,
나는 비오는 버전을 더 좋아해서,
이 곡을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다.
이번에 라이브로 듣는 호강을 누렸다.
예전에 윤종신이 자라섬 페스티벌을 한 적 있는데,
그때 유희열과 함께 1996년 앨범 B면 첫 곡 아침, 오늘을
불러줬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윤종신이 다작하는 가수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르겠다.
그 시기마다 추억이 있고,
그때의 나와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회상'이나 '그리움'이 취미생활 같은 내게,
윤종신을 좋아한 건 너무 긍정적이다.
아픈 것도, 힘든 것도, 좋은 것도,
노래가 배경이 되었고
그 곡들로 인해 마음을 씻거나 부풀리거나 할 수 있었다.
평정심을 찾아갈 때도 마찬가지.
어린 시절엔 윤종신 신보 앨범을 잘 싸서 서랍에 넣어놓고,
이번 시험이 끝나면, 이번 과제가 끝나면,
이번 방학이 끝나면,
그런 식으로 참아가며 들었다.
노래 한 곡을 듣기 위해 내가 인생에 기울인 노력은
나름 어마어마했다.
스스로의 절제 바로미터가 윤종신 앨범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월간윤종신을 듣기 위해,
이번 마감이 끝나면, 이번 과업이 끝나면,
온갖 이유를 들어
잘 참았다가 듣는다.
해야 할 일을 마치고 그 곡을 들었을 때 희열은
비타민같은 영양제보다 훨씬 강하고,
거의 응급실 수액 느낌이랄까.
후련하고 감동인 상태.
윤종신 콘서트를 3년을 기다렸다.
중간중간 얼마나 라이브가 보고 싶었는데,
잘 참았다.
전국투어를 관객투어로 전 코스를 다 쫓아다닐 순 없겠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려고 계획을 짰다.
그 일정을 위해 또 일상을 충실하게 살게 되겠지.
지역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고,
그때그때의 내가 다를 테니,
온전히 늦봄과 초여름은
윤종신 노래에 기대어 행복하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