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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마음

부국제 산책

by 레아

모든 게 빠르게 변하고 매체의 형식도 마찬가지다.

영화관에 사람이 드문 시기를 보내고 있다.

동네 극장에 가면 넓은 스크린 앞으로 대여섯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무려 널찍한 데서 혼자 볼 때도 있다.

그 넓은 상영관을 홀로 대여한 처럼 말이다.

좋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

탁월한 개인 여가를 즐기지만

동시에 극장산업을 걱정한다.

학교 입학 전 어린 시절부터 충무로 극장을 다닌 나로선,

이 공간의 흥망성쇠를 경험하 있다.

작품 자체의 질과 영화적 체험의 성격은

나아지고 있지만 '함께'여서 좋았던 분위기는

사라져간다. 애틋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단 한 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재촉해 갔고

한동안 감흥에 취해 센텀시티 스타벅스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봤고

영화의 전당을 산책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대화자리에 한 시간 내내

앉아 경청했다.


극장에선 시간을 바투로 맞춰온 이들이

영화관에 가려

다같이 줄줄이 8층 매표 극장 로비로 줄지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만석이라

상영 전 5분 정도를 남겨놓고,

시간을 바투로 온 관객들이 줄줄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다.

한쪽으로 빠르게 걸어올라가는 이들은

모두 쇼핑객이 아니라 영화관객이었다.

극장은 가득 찼고,

지각한 관객도 조심스레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 감격했다.


축제는 그 분야 전문가와 마니아, 그들의 친구,

직업 종사자들이 공간을 메운다.

멀찍이 떨어져 보면 어떤 분야의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이 한순간에 응집돼 순간 멈춤을 한 느낌이다.

즐기는 관람객과 방문자들은 손님이고,

그 안의 수많은 영화의 제작진과 축제 스태프들이

주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주인과 손님은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축제는 이어질 것이다.

영화의 꿈을 꾸는 이와 꿈을 꿨던 이와 꿈을 꾸게 될

이들이 한데 뒤섞이어 시간은 흐른다.


밤에는 센텀시티를 걸었다.

영화를 보고 롯데 시네마 건물을 나왔을 때

그 후문 바로 앞으로 태양의 서커스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롯데 건물의 뒷문이 환상으로 통하는

연결고리처럼 느껴졌다.

70년대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눈 앞으로 이국의 서커스가 펼쳐진다.

애수 어린 라이브 음악이 서커스 천막 에서 들려왔다.

귀뚜라미 소리도 같이 들렸다.

가을이구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을을 맞이했다.

그보디는 먼저 KTX에서 양산 지역을 지나고

있을 때 부분 부분 붉은 물이 든 나무를

올해 처음 보았다. 가을이었다.

태양의 서커스 공연장을 돌아

스타벅스에 들어가 두세시간 앉아 글을 썼고

다시 나와 또 걸었을 땐 이미 서커스가

끝난 뒤였다.

그날의 축제 마지막 작이 상영되고 있었.

장률 감독의 '루오모의 황혼'

하늘연극장에서 들리는 영화 음성을 배경으로

불이 꺼진 레드카펫과

정리가 끝난 푸드코트를 지나

하늘극장 앞 로비를 걸었다.

그때 익숙한 92년도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이오공감.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왜 슬픈 예감을 틀린 적이 없나' 독백 같은 대사로 지금에도 더 유명한 가요.

로비 카페에서 틀어놓은 음악이었다.

노래 한 곡이 다 끝날 때까지 듣다가 영화의 전당을 나왔다.

늦은 밤, 그곳을 메운 이들은, 혹은 나처럼 스쳐가는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있을까.

이오공감은 이승환과 오태호 둘이 함께 낸 앨범이었다.

이승환 에이면과 오태호 비면, 테이프 양쪽으로 모두 삶에 대한 열망이 담긴 앨범이었다.

지금 들어도 모든 가사가 순수해서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빈 영화관에서 자주 영화를 보다, 사람이 가득 찬 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어릴 적 가졌던 순수한 열망들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게 이런 거구나.

내가 현실에 침체되지 않도록,

그 안에 갇혀서 버둥거리거나 번뇌에 잠길 때,

어릴 적 첫마음, 순수했고 어쩌면 순진했던 마음,

이제는 잃었지만 떠올리면 다시금 갖고 싶은 꿈이 타입캡슐처럼 담긴 대상이구나,

영화의 전당에서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듣다 생각했다.

전당을 나왔을 땐 귀뚜라미가 계속 울었고,

그 소리를 들으며 영화의 에너지로 가득 찼을, 한적한 밤의 센텀을 걸었다.




https://youtu.be/9tb3yL384p0?si=BBcdm7_Q5u9AT_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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