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부터 내가 좋아한 가수
어른이 되면서 매년 이승환 콘서트를 가는 게
인생의 '루틴'이 되었다.
어른이 되면 이승환 라이브를 보고 싶었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실현한 셈이다.
슬럼프를 겪거나 일에 치일 땐 못 갈 때도 있었지만,
주기적으로 전국투어가 열리고,
간간이 기획공연이 진행되기 때문에
진짜 팬이라면 '못' 갈 수가 없는 공연이긴 하다.
팬의 단계가 있다면,
나는 특별 등급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등급일 거 같다.
가수도 노래도 다 몹시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묘한 마음이 지속된다.
학창시절부터 이승환을 좋아하는 팬들이 주변에 꼭 있었다.
단짝 중에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승환은 '친구의 남자(?)' 라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다.
이제 점차 나이가 들고
나의 콘서트 출석률이 왕년 이승환 팬보다 높아져 가도,'
여전히 멀다.
어디까지나 거리감이 있지만
예의를 갖춰 대하는 '남의 남자' 느낌이다.
(이 무슨 어이없는 대입 ㅎㅎ)
학창시절 나는 윤종신과 정석원 팬이었고,
또 여러 가수를 두루두루 다 좋아했기에
이승환 팬들과 엄청 친했다.
왜냐하면 서로 얘기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어제 라디오에서 '그랬대. 그랬대.'
각각의 가수가 했던 에피소드를 마치 복습하듯이
학교에 와서 낮에 과자를 사먹으며
운동장을 걸어다니며 수다를 떠는 것이다.
이게 더 나이가 들고 보니
각자의 남자 친구, 각자의 남편, 각자의 옛 연인 얘기를
나누는 것과 같은 패턴이다.
그래서 어릴 적 좋아했던 대상이 강했던 이들은
연애나 사랑의 감정에도 쉽게 빠지는 것 같다.
물론 개개인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감정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얘기를 나누는 이들은
자신의 미묘한 변화라든가 감정의 색채를 잘 파악하게 된다.
게다가 가요는 사랑 노래가 많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듣는 게 습관화된 이들은
그 감정을 스스로 자처해서 경험하는 경우도 많고,
그게 도돌이표나 촉매제가 되면서 더 사랑을 꿈꾸는 이가
되고 만다.
이승환 팬인 친구들을 떠올려 보았다.
일단 중학교 1학년 때 이승환 팬.
이승환뿐만 아니라 체육 선생님도 좋아했다.
그 친구의 열렬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늘 지극정성으로 선물이며 관심을 선생님에게 표현했다.
친구가 끼고 살던 음악은 이승환이었다.
이승환 팬의 정체성은 솔직함과 표현력,
그리고 적극성과 과감함(?)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합창대회 반주를,
2학년 때 지휘를 하며 음악 시간을 좋아했는데,
그때 피아노 학원을 함께 다녔던 이,
2학년 때 반주를 맡은 친구가 이승환 팬이었다.
모든 노래를 정말이지 사랑했다.
친구는 대회 때 감동에 벅차 있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뭔가 어깨를 들썩이거나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포즈들이 떠오른다.
에너지가 넘친 것일 수도 있다.
합창대회 내내 그 친구를 신뢰했다.
우리가 수상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조회시간마다
운동장에서 애국가, 교가 지휘를 했는데
그러고보면 2학년 때 상을 탄 거 같다.
추억은 희미해져도 그때 가요를 사랑했던 친구들의
인상착의나 말투는 눈에 선하다.
예술중학교도 아니고 음악동아리도 아니었는데,
가요나 합창대회에 흠뻑 빠져 있던 그 시기들.
이승환 노래가 줄곧 BGM으로 흘렀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이승환 팬들.
경쟁이 심한 학교에서 이들은 감성이 마르지 않는 이들였다.
편지 친구이기도 했다.
친구가 테이프에 자신이 선곡한 노래들을 골라서
정성스럽게 A면, B면까지 만들어서 준 것들을
아직 갖고 있다.
어딘가 서랍 깊숙이 있을 것이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그 시절
감동의 선물. 당연히 이승환 곡들이 많다.
얼마 전 이사하면서 이승환 팬인 친구 편지를 다시 봤는데,
과거 이승환 콘서트나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찍은 필름 카메라 사진도 준 것이다.
덕수궁 뒤 옛날 정동극장의 사진이 있어서 놀랐다.
가끔 기억 창고처럼 불쑥불쑥 그때 테이프나 사진을 보면 반갑고 새로운 일만 같다.
대학교에서 만난 이승환 팬들.
이땐 여자보다 남자가 많다.
10대 때는 주변에 이승환 팬은 여자들이 많았는데,
20대 이후로는 남자들이 많다.
그 이유는, 이승환 노래를 노래방에서 부르기 때문이었다.
노래방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친구들이
대개 이승환 팬이었다.
대학시절 학과 밴드를 했던 나는,
보컬을 뽑을 때 그 후보자들이 노래방에서 이승환 노래를
부르던 것을 기억한다.
나 좀 노래 한다 하는 친구들은,
그대가 그대를, 천일동안 이런 곡을 불렀다.
거대 발라드!
그들은 졸업 후 영화나 문학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만난 이승환 팬들.
역시 남자들이 수적으로 우월했다.
또 마찬가지로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를 잡으면 이승환 곡을 부른다.
특히 1시간, 2시간 시간제로 놀았던 노래방에서,
마감 시간이 다가올 즈음,
대미는 또 이승환 곡이었다.
거대 발라드!
이렇게 이승환은, 늘 내 인생 반경에 있다.
올해 전국투어 콘서트를 갔는데,
내 옆 이승환 열혈 팬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따라 불렀다.
거의 귀에 꽂히는 목소리였다.
나는 마치 노래방에서 마이크 안 놓는 사람을 만난 것마냥
살짝 짜증도 났다. 이승환 노래를 들으러 콘서트에 왔는데,
그의 팬 목소리가 내내 울리다니... ㅜ
같은 팬이니깐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자 하면서도,
웃픈 현실. 공연장을 나온 뒤 어릴 적 노래방에만 가면
이승환 노래만 부르던 친구나 회사 선배, 동기 등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래, 그들을 떠올리며 이런 건 애교로 여기자.
그럼에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다음에는 콘서트 때 앞자리 예매하나 봐라.
그냥 2층이나 1층 멀찍이 뒤에 가서 조용히 감상할 테다.
특히 2층 정중앙에 앉으면
가수가 나를 위해서만 노래를 불러주는 착각에 잠길 수 있다.
2층 앞으로 객석이 잘 안 보이고,
정중앙 저 멀리 가수만 보이면
마치 독대하고 노래를 감상하는 느낌이니깐.
다음엔 꼭 그러자고 다짐했다.
이 역시 웃픈 팬의 바람이다.
그렇게 속상해 했던 콘서트를 M사 녹화 중계로 다시
보았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 얄팍한 팬의 마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