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아프레스 Nov 19. 2020

퀸 아망

뇌를 비워

정자동을 걷다가 바깥 테이블 손님들이 파리지앵으로 보이는 빵집에 들어갔다. 찬장에 베스트 1위와 4위로 진열된 제품을 골랐다.

판매율(?)4위는 독특한 어감을 지녔다.

퀸 아망(KOUIGN AMAN). 부드러운 버터  빵이란 뜻이란다. 반죽 결이 촘촘하고 버터로 바삭바삭하게 구워져, 무늬 가는 방향대로 뜯어 먹을 수 있었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에서 1860년대에 만들어졌다니, 조선이 프랑스와 첫 교류(1886)도 맺기 전에 태어난

옛날 빵이었다. 이미 빵 애호가들의 사랑 대상이었다.

힘을 주고 자르면 가루가 많이 생기지만

결대로 정성껏 자르면 제법 우아하게 먹을 수 있었다.

먹고난 자리의 흔적은 빵가루로 가득했지만,

낯설고 이국적인 만남에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우연히 들어간 빵 집의 낯선 빵에서 어떤 작품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로사스 무용단을 만든 안느 테레사의 규칙적인 동작.  (또다른 작은 예전에 정자역에서 만난 공연기획자들이 만든 식당과 뮤지컬. 세번째는 서태지 모하이 뮤직비디오.)

동그랗게 규칙적으로 말린 프랑스 빵을 친구랑 조심스레 설레어하며 처음 맛본 순간,

퀸 아망의 문양들이  빵을 만드는 이들의 규칙적인 손길과 그로 인한 빼어난 결과물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늦은 밤, 무용하는 지인과 온라인 대화를 나누다

긴 시간 함께 웃은 적이 있다. 일정한 호흡과 정결한 동작들을 반복해 흰 가루 꽃잎 같은 흔적을 남긴 무용수 자취를, 피자 반죽으로 연상한 것이다.

요새 알볼로 피자 브랜드에서 팔자 피자, 어깨 피자 등등을 출시해 이병헌이 광고했는데 그 이전 친구도 그런 이름의 피자를 이미 구상했고 그런 피자집 지하나 이층에는 정말 몸을 쭉쭉 '피는' 워크숍이 열리고 상시로 무용을 감상하는 체험형 예술 공간이 생기면 좋겠다는,

그런 류의 사담을 나눴다. (지인의 그 무용단은 정말로

비슷한 꿈을 이룬 것인지 성수동 근처에

무용단 이름을 딴 살롱을 열었다. 개업 소식을 보고는

좋은 쪽으로 소름 돋는 반가움을 느꼈다.)

당시 한창 유튜브에서 안느의 옛날 무용작을 즐겨 보며 무용음악으로 쓰인 스티브라이히 곡들을 멜론에서 반복해 듣곤 했다. 그래서 무용가가 피자집을 차리면 반죽마저도 무용 작품으로 생성되고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도우'?,라고 떠올리며 수다를 나눴다.

무용의 어떤 특정 동작들은 무용과 전혀 무관한 이에게도 특이한 감각을 선물할 때가 많은데, 벨기에 무용가 안느의 젊은 시절 작품도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2018년 서울현대미술관에서도 라이브로 공연되었다) 내게 좀 특별한 시간, 뇌를 비우는 감각을 선물했다. 물론 안무 목적이나 배경은 나의 결과와 완전 무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적어도 그 영상을 보거나 스티브 라이히 음악을 듣고 있으면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동작과 리듬이 무언가 서서히 비워가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답답할 때 보라는 영상으로,

안느 유튜브 링크를 보내기도 했다.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바커 이름으로 검색. 혹은 로사스)

숲을 배경으로 화이트 원피스를 정갈하게 입은 채

단발을 한 모습도 단촐하고 거기서 매우 절도있게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의 생활 리듬도 그와 같이 번잡하지 않게

간결히 순서를 부여하고 정리해 가면,

어느덧 스트레스를 줄여가는 생활의 질서가 잡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시간의 자취가 그 안무가 만들어낸 바닥 흔적처럼 아름답다면 그또한 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니, 그래서 종종 되풀이해 보곤 한다.

감상 느낌은 오래된 것들을 한번에 버린 정리 청소 후 감정과도 좀  비슷할 것 같다.


정자동 아망퀸을 보다 무소유 같던 안느 춤을 떠올렸다.

특히나 그가 팔을 흔들고 뛰는 단조로운 동작들이

아이들도 누구나 처음 춤을 출 때 할 수 있는

초기의 동작이라는 견해도

너무  군더더기 없이 멋있다.


나는 어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나면 꼭 다른 소개해줄

사람을 떠올리거나 같이 작업하면 좋을 파트너를

떠올리곤 하는 쓸데없는 습관이 있는데,

안느에게 소개하고픈 옛날 남자가 있다. 김해경.

만약 이상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토록 <권태>에 못 이겨 몸서리치던 그에게 로사스 무용단의 클립을 선물하고 싶었다. 과거 이상 산문을 좋아했던 난 그가 지리멸렬하고

자의식을 해소할 수 없는 상황을 고통스러워하던 태도에 쉽사리 동화되며, 권태라는 작품을 좋아했는데

그런 그라도 안느의 숲과 춤의 흔적을 보았더라면

지구의 초록을 지루해하고 소의 되새김질에 진절머리치던

그의 마음을 토닥여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권태로 생각을  거부하는 그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송사리 움직임을 미워하는 듯 좋아하는 그 모습들이 복잡미묘하게 다가왔던 적이 있다. 시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그의 권태는 배격의 대상이 아니라

슬프게도 세상에 무력하나 생활의 생기, 미를 발견한

사람의 비애 같았는데,

그런 때 단조롭지만 사실 너무 정교한 움직임의 질서,

그런 모순적 감상이 필요했던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날아보자꾸나의 그 작가 실제 넋두리가

더 많이 담긴 산문들을 보면

생각을 끊겠다는 그가

끊임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에 애달파진다.

이 시점에 또 떠오르는 노래는

주술처럼 듣고 나면 귀에 맴도는

윤종신의 곡 <뇌를 비워>.

팬인 나도 종종 이 노래 제목을 배를 채워로 착각할

때가 있었다.

뇌를 비워, 배를 채워,

가사가 반복되고 양념짭짭후르르 후렴에 이른다.

음식 페스티벌 송이었는데

이 또한 축제와 무관하게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틀어놓는, 반복 어구 노래다.

해소가 되다가 마치 권태 이상처럼

생각이 많아지면,

또 듣고

또 듣다 결국 중독송이 되어버린다.

수능 중독송으로 유명한 곡처럼

(바다의 매드는 진짜 심하게 중독.)

사람마다 개인적으로 중독송이 있을 텐데,

내겐 '뇌를 비워 배를 채워', '싸늘히 식은 <핫바>',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영계백숙 오오오오'

그런 윤종신 음식송들이 종종 중독처럼 떠오른다.

재주소년의 '아니 벌써 <>이 나오다니'도 마찬가지.


퀸 아망의 동글동글 반복 문양으로 친구와 배를 채운 날,

뇌를 비우려다 채우고 다시 비울 수 있게 부추기는

공연과 노래가 빙빙 맴돌았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