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데우스

환희가 지나쳐 시기가 되어버린 자의 진술

by 레아

나는 위대한 이야기로 평범한 그저 그런 음악을 만들었고

그는 평범한 이야기로 영원히 남을 음악을 만들었다.


나는 살리에리, 그는 모차르트.

연극 모차르트, 아니 <아마데우스>를 본 뒤

한동안 머릿속에서 모차르트 모습이 맴돌았다.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천진난만한 감각을 지닌 예술인의

전형이었다. 희희낙락하는 듯해도 그 안은

진중하고, 한없이 어두울 것 같아도 유머러스한 포즈를

잃지 않는 이. 천재였으나 어딘가 일상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창작자. 자신감에 차 있고 오만한 듯 해도

사랑받지 않고는 못 배길 매력의 소유.


영국 극작가 페터 셰퍼가 그린,

아마데우스 속 모차르트는 살리에리 진술을 통해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비상한 음악적 능력을 지닌 이로 묘사된다.

삶의 순간순간을, 음악으로 모조리 표현했던 사람이다.

출중한 능력을 가졌으나 말년에 가난과 외로움 속에

쓸쓸히 죽은 작곡가.

부나 명예를 쉽사리 얻을 만했음에도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하고 죽은 것이,

살리에리 자신이 권력을 이용해 훼방을 놓은 것 때문이라는

망상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살리에리가 질투의 화신이나 아류, 2인자 등

비유되는 인물로 쓰이는 데 계기가 됐던 작품다.


어릴 적 주말의 명화에서 유명 성우 더빙판으로 보았던

연극을 국내 버전 재연 공연으로 른이 되어

관람하다보니,

나는 난데없이 모차르트에 빠져 버렸다.

아마데우스 연극이 공연되던 겨울에는

모차르트가 십대 때 쓴 악보가 최초로

공개돼 조성진이 세계 초연을 하는 행운과도

시기가 겹쳤고, 허구와 현실의 모차르트 안에서,

영원히 살아남은 모차르트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몇 해 전 다녀온 모차르트 고향 골목을 반추하며

시간 나는 대로 음악을 곤 했다.


특히 극 중에, 모차르트를 가리켜

음표가 너무 많아 경망스럽다는 식

궁정 음악 감독의 비하 표현이 나오는데,

'투머치'한 느낌! 약간 정신사납다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떤 정수를 뽑아낼 만한

산만한 극들을 대체로 선호하는 까닭에

모차르트는 마치 내가 좋아하는 대상들에 대한

축약어마냥 다가오기도 했다.


연극 아마데우스는 2018 초연에서 조정석, 김재욱, 인피티니 성규가,

이번 2020-2021에는 박은석, 백석광, 최재웅, 성규, 강영석이 모차르트를 맡았다.

올해 살리에리는 지현준, 차지연, 김재범이었고,

이번 편에 새이 합류한 김재범 배우편으로 차례 관람했다.

마지막 공연을 보던 날,

(줄거리가 있는 연극에서 극이 끝나가는 게 아쉽다 느낀 건, 2017년 파운틴헤드 관람 이후 처음이었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서인 게 이유이기도 했겠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특정 몇 장면 때문에,

볼 때마다 다음에 또 보고 싶었다.


방백으로 "미래의 유령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겠다며

말을 거는 순간부터,

모차르트에게 좌절한 뒤 자신을 실패의 화신으로 지목하며

당신의 실패마저 용서해주겠다며

끝인사를 건네는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의 낭독회에 초대된 기분으로 관람했다.


특히 모차르트 음악을 극장에서 내내 들을 수 있다 보니

음악감상실 밖으로 헤어나오기 쉽지 않았고

살리에리가 낭독극의 내레이터처럼 느.

사실은 연극이나 음악극이 아니라

문학 라디오 극장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배우가 모차르트에 대한 감상을 진술하는

해설하는 콘서트를 보고 있는 정에도 잠겼다.

낭독극 안에 모션도 있고 조명도 쏴주고 다른 요소들이

연달아 차례대로 들어왔다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살리에리는 질투의 표상기 전에,

내겐 모차르트 특급 마니아로 보였다.

성덕의 경지에 오른 덕후 중의 덕후였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너무 감탄한 나머지

숨을 제대로 못 쉬고 환청이 들리고

심지어 연주 없이 악보만 보고도 음악을 상상하다가

뒤로 나자빠졌다가 쓰러져서 한동안 못 일어나는 등,

어떤 이가 어떤 이의 작품에 반해 정신을 못차리는,

과도한 탐닉의 극적 장면을 기했다.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자기만이 이 작품을 이해했다느니,

몇 회 안 올라간 오페라를 혼자 몰래 가서

다 보았다느니,

레퀴엠 악보를 보곤

음악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모차르트가

죽은 이를 위한 작품이라니,

이게 누구를 위한 것이냐!,

소스라치게 놀라 절규할 땐

먼저 발견한 자의

환희란 저런 것이지,하며 공감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영혼을 내다버린 자신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자조하기까지 하는데,

무슨 자기가 모차르트 1인 관객도 아니고

과도한 애정 아닌가 싶다가도 측은하기도 했다.


그런 살라에리가 모차르트 월급 깎아내리고

질투심을 느낄 때는 동조가 되진 않고

저 못된 놈,하며 좋아하던 배우를 다시 얄밉게 느끼며,

두 시간가량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리에리의 독백에, 나는 시시콜콜 흥미를 느꼈다.

맨 뒤에서 볼 땐 그가 얄미워 보였다가

앞자리로 전진할수록 살리에리도 좀 안됐네,

하면서 감정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간직하고 싶은 명장면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 악보를 입수해 펼쳐 본 뒤

음악을 상상하는 1막 마지막 몇 분 간다.


배우가 웅크렸다 뒤로 물러났다 쓰러졌다 일어났다

악보를 보고 전율을 하는데

흰 천막 뒤로 모차르트가 지휘를 하고 있고

살리에리가 그걸 멍하니 고 있다,

하늘의 신을 향해 지금부터 당신은 자신의 적이라며,

욕망을 주었으나 재능을 주지 않은 신을 노려보며

진노하는

장면이다.

자신에게 모차르트같은 능력을 부여치 않은 신을 탓하며

신과의 단절을 선언하는데,

정작 무대 뒤편 모차르트가

지휘하는 형체가 십자가처럼 실루엣으로 비

모차르트 단독 무대만 리프트로 상승한다.

레퀴엠이 흐르며 신과 작별을 고하는 살리에리가

결국 또다른 신으로 모차르트를 안으로 섬기는 듯하고,

그에 따라 인생이 극적으로 얽매이는 모습이

그 한 장면에 다 담 보였다.

탐미의 순간이 시대 배경 탓에

절대적 신과의 반항적 대결로 처리돼 , 자신을 저주하는

그의 처지도 납득이 갔다.


인터미션 후에 다른 장면에선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면 살리에리가

그랜드 피아노에 얼굴을 대고 반시계 방향으로

피아노를 느리게 미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또한

살리에리가 음악에 반한, 복합적 마음의 모션이라

기억에 남는다. 아주 천천히 피아노를 민다.

멀리서 볼 땐 요상해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되게 온몸으로 모차르트를 흠모하고 질투하는 듯 보였다.


2막은 모차르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쉴 새 없이 작품을 쓰며 쇠약해져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역시 렇듯

살리에리는 염탐도 하고 소문도 수집하면서

동시에

그의 음악을 넋 놓고 감상한다.

그리고 모차르트가 죽어가면서

미완으로 남긴 레퀴엠을, 살리에리가

악보에 음표들을 받아 적어 주며,

또 극심하게 감탄하다 국 과거를 회개하며

모차르트에게 잘못을 다. 너의 인생이

힘들어진 게 다 내 탓이라며 용서를 갈구하는데,

그런 그의 발언이

안중에도 없는 모차르트는 그 사과를 받지 않 죽는다. 자살로라도 자신이 모차르트 살해범이라고

증명하려던 살리에리는 그조차 세상에 외면 당하고

모차르트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사랑받고 있다며,

자신을 세상에 잊힌 실패자로 규정한다.



처음 극을 보았을 때는, 현실 속 사람들이 떠올랐다.

평범한 작품을 내놓지만

그간 쌓아온 것들로 인해 근엄한 주제 안에서

적당히 안주하는 의 사람들과,

부를 걸머쥐거나 안정된 지위를 누리는 것과는

거리가 있만 작품이 놀라운 혁신을 발하고

늘 새로이 사랑받는 작업자들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정신적으로 작품 안에서 늙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전자들은 후자들을 질투하고 흠모하면서도

내색 안 하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자는 살리에리 과. 후자는 모차르트 과.


극 속 살라에리의 인생 준거 인물이 모차르트였던 게 안타깝다.

만일 질투나 좌절이 없었다면

재밌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살리에리가 궁정 작곡가가

아니라 그때의 황제였거나 관객 후원가였다면 어땠을까.

아니, 본래 시기 성정이 강했다면 다른 직책이었더라도

시기했을까.

아마데우스 속 살리에리의 환희 쪽에 좀

치중되어 관람한 나로서는, 질투가 됐든 뭐가 됐든

음악에 푹 빠진 모차르트는 주변의 그런 게 다 의미 없었을 것 같다.

실제로도 그러지 않았을까. 주변인들의 모든 것을 일일이 연연했다면 그런 다작도 명작도 불가능했을 것만 같다.

극장 문을 나서며

꼭 언젠가 잘츠부르크와 비엔나에

가고 싶기도 했고, 모차르트 고향길을

걸어본 몇 해 전 기억이 재차 떠오르기도 했다.

또 가면 그 거리에선 모차르트만 듣고 모차르트 흔적만

돌아봐야겠다.

모차르트 집 1층 슈퍼에서 다시 빵을,

모차르트가 자주 가던

당구장 카페서 비엔나 커피를 사

모차르트가 유아세례 받은 대성당 정원 앉아

차르트 포장 콜릿 뜯어 당충전하며 음악을 듣기.


가난한 천재 예술가의 영원한 귀환,

영생을 축복하며

말이다.


모차르트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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