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로

겨울밤 어떤 사람들

by 레아

1941년 서울(경성) 생을 접고

고향 진도로 떠날 참이던

종기와 계선은,

자신들을 초대한 여인을 만나

이러쿵저러쿵 인생 얘기를 늘어놓으며

본인들 젓대 연주 실력을 드러내던 중

과거에 잃었던 인연,

불세출의 예인 기생 산월을 떠올리게 된다.

서로의 사연에 심취하다

초대자가 산월의 딸임을 알게 되고

산월의 기일, 그를 보내주는 한바탕 자리를

마련하고 또다시 길을 떠난다.


음악극을 표방한 적로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일제시대 인기 있던 대금 가인 박종기, 김계선

실제 인물을 소재화한 공연이었다.


뜻글자 한자어가 불러일으킨 호기심 탓인지,

적로에 제목에 끌리었던 중,

친구의 권유로 함께 관람했다.


적로는 이슬 방울 혹은 대금에 맺히는 숨결의 흔적 외에

붉은 핏방울을 뜻하고 있었다.

악기 연주자의 몸에서 흐른 피가

본인이 애지중지 아끼어 물아일체 된 대상에 스며

떨어지는 것.

공연은 절대 음울하지 않았으나

제목이 주는 울림은 두터웠다.


여성 출연자가 들려주는 '정가'는

피리부는 나그네들의

신파적 분위기와는 대조되게

차갑고 절제된 인상을 풍기는데

우리나라 전통 음악 장르로

민요나 판소리와 다른 성악 장르라 했다.

정가를 부르는 하윤주 배우의 연기로 감상했다.

현실감이 사라지는 듯한 오묘한 음성이

내면을 정제하는, 일종의 수련으로 느껴졌다.


적로, 핏방울과 여성 보컬의 음성.

그날 기억에 남은 두 가지.


20191221 종로

겨울 눈이 내리다 그친 밤이었고

바닥에 살어름이 살짝 군데군데 생기었고

처음 찾은 극장은 고즈넉하니 소담했다.


지하 공연장에 약간 폐소공포증이 있어서

깊게 내려가는 것을 다소 꺼려하는 편인데

목재가 주는 편안함 탓인지

돈화문국악당 소극장은 거부감이 덜했다.


공연을 보고 심야 업무가 있어서,

늦은 끼니를 때우러

친구와 돈화문 근처 맛집에서

살라미를 먹었다.


그리고 늦은 밤 어느 배우의 노래 녹음 현장에 있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던 무렵,

뼛속에서 빼어낸 힘까지 다 쓰고

노래를 부르던 배우를 보면서,

적로의 악기 핏방울은

옛날 예인이 아니라,

지금 어디라도,

무대에 오르고 관객을 만나고

프로가 되었고 더한 프로가 되기 위한

창작자들 몸에 그렇게 흐르고

있단 생각을 했다.


돈화문 맛집에서 우연히 만난 알앤비 가수에게서

뱅쇼와 캬라멜,

춤을 추는 친구에게서

이탈리아 소시지를 얻어 먹은 밤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끝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감흥을 얻은

새벽녘 택시를 탔다.


피가 되고 길이 되는 예인의 삶.

공연 자체보다 때론 그곳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가 더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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