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동욱이가 두 돌이 다가올 즈음, 남편은 캐나다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고 있었고, 나는 혼자 한국에서 세아이들을 돌보며 남편이 있는 캐나다로 이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 살고 있던 내 베프는, 내가 캐나다로 떠나기 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며 여행을 계획했다. 바로 10년 전 2014년 1월.. 친구와 다섯 아이들과 함께한 2박 3일 경주로 떠난 잊지 못할 여행이다.
아이들이 어리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여행을하기보다, 대형 실내 워터파크가 딸린 한화리조트에서 2박 3일간 호캉스를 즐기기로 했다. 키친이 딸려있는 콘도룸에서 요리도 해 먹고, 수영복 입은 채로 애들 데리고 내려가서 수영장에서 놀다가, 피곤하면 올라와서 낮잠 자고, 호텔 주변을 산책하고, 밤에 애들이 자고 나면, 둘이서 와인 마시고~ 이런 호사스러운 여행이 없을 거 같지만, 남편들 없이 애들 다섯을 데리고 여행하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좋은 여행이 다시 올까 싶다. 이미 아이들이 다 커버렸으니 말이다.
아이들과 놀아주다 밤이 되어 애들이 지쳐 잠이 들면 그때부터 우리 둘만의 파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만해도 흔하지 않던 밀키트들이 나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는데, 전날 온라인으로주문해서 처음으로 이용해 보았다. 그대로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어묵탕, 오리 양념구이, 닭똥집 등의 안주들이었는데 꽤나 근사했다. 우리 둘만의 야식으로는 최고였고, 너무 간편해서, 와~ 세상이 너무 좋아졌네 했던 게 10년 전이다 ㅎㅎ 이렇게 야밤의 와인 파티를 위해 밤마다 새로운 안주가 세팅되었다.
둘이 와인 마시며 밤을 꼴딱 새워도 모자랄 이야기들을 하면서, 내 미래의 불안한 맘들은 흘려보내고,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생각만 한 것 같고, 실제로도 너무 행복했다.
여행 마지막 저녁을 위해 친구가 맛있는 쇠고기 요리를 하나 해주겠다고 미리 이야기했었다. 여행오기 전 날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알려줘서 내가 따로 장을 봐왔었다. 쇠고기랑 각종 소스는 친구가 준비해 오고, 감자, 당근, 양파, 토마토, 양송이버섯, 셀러리, 마늘 등이었다. 그때는 어떤 요리인지도 모르고 생소해서 셀러리를 대파 한 단만큼이나 많이 샀던 기억이 ㅎㅎ
친구의 전두 지휘로 옆에서 만드는 걸 지켜보며 나는 야채 써는 것을 도왔다. 야채랑 쇠고기를 모두 커다란 큐브 형태로 썰고, 어마하게 많은 양의 양송이버섯도 썰어놨다.
달구어둔 커다란 스테인리스 양수 냄비에 버터를 넣고 밀가루 코팅해 둔 쇠고기를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게 빠르게 겉면을 익힌 후 소금, 후추를 뿌려주고 쇠고기는 따로 접시에 덜어둔다. 같은 냄비에 올리브 오일을 넣어 마늘을 볶다가 그 후 감자, 당근 순으로 야채를 넣어 함께 볶아준다. 야채가 반 정도 익으면, 미리 볶아둔 쇠고기도 함께 넣어 주는데 이때 친구가 비장의 무기인 레드 와인을 꺼내왔다. 남편이 추천해 준 레드 와인이라면서, 절반은 여기 붓고, 나머지는 밤에 우리가 먹을 거라고~ 고기의 잡내가 날아가고 부드럽게 만들어 줄 중요한 재료다. 보통 요리에 쓰이는 와인은 저렴한 걸 쓰는데, 이 날 친구는 제법 좋은 와인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토마토와 셀러리, 월계수 잎을 넣어 함께 끓이면 된다. 치킨 스톡과 물로 농도를 조절하고 (치킨 broth를 넣어도 됨), 한번 저어준 후 그제야 뚜껑을 닫았다.
"이런 걸 언제 배웠어? 너무 맛있겠다! 이제 다 끓으면 먹을 수 있는 거야?"
"무슨 소리~! 끓고 나면 약한 불로 1시간 30분 이상은 끓여야 돼"
나름 아이 셋을 낳고, 매일 여러 가지 요리를 섭렵하며 살고 있던 나였지만, 이런 프랑스 요리는 생전 처음이었다. 10년 전이니 유튜브도 없던 시절이었다. 친구는 캐나다 오타와에 사는 콜린 님의 요리 블로그를 알려주면서, 그 레시피를 참조했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캐나다에 살게 될 거니, 요리 재료나 정보 등을 찾는데 유용할 거라고 하면서 소개해주었는데, 캐나다 이민 초기에 참 많은 도움을 받은 블로그다.
내 친구가 팬 앞에서 올리브 오일, 버터, 와인 등을 이용해서 요리책도 없이 능수능란하게 요리를 하는 모습이 내겐 상당히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요리 이름 또한 비프 브루기뇽이라니 상당히 고급지지 않나 ㅋㅋ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요리가 완성되어 커다란 접시에 밥과 함께 담겼다. 아이들거까지 도합 7 접시였다.
그날 처음 맛본 비프 브루기뇽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쇠고기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포크로 살짝 눌러도 잘릴 정도로 연했다. 입안에 한입 넣는 순간 그 조화로움이 너무나 완벽했다. 고기가 다한 요리였다. 아이들도 깨끗이 접시를 비운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 어떻게 고기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지?"
"원래 쇠고기를 오래 끓이면 단단한 조직이 풀어져서 더 부드러워지지. 남편이 준 와인도 한몫했다 ㅎㅎ"
콘도에서 이렇게 고급진 요리를 해 먹다니.. 프랑스의 고급 레스토랑 맛 부럽지 않았다.
그날의 요리 이후 비프스튜, 비프 브루기뇽을 참 많이 따라 하며 만들어 먹어봤는데 어떨 땐 쇠고기가 부드럽지 않고 질겼고, 어떨 땐 토마토 대신 넣은 토마토소스 때문에 신맛이 너무 강했다. 고기가 부드럽게 요리되어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때조차도 그때 경주에서 맛본 그것만큼은 아니었다.
이젠 추운 겨울이면 자주 해 먹는 익숙한 요리이지만, 10년 전 처음 맛본 그때 그 비프 브루기뇽이 최고였다는 건 지금도 여전하다. 친구가 가지고 온 그 와인이 있어야 하나? ㅎㅎ
육즙과 부드러움, 진한 맛의 조화를 다 가진 비프 부루기뇽을 먹으며 배 두드리며 행복해하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