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꿈이 뭐야?
초등학교 때 꿈이야기를 물으면 나는 늘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 어른은 내가 매일 만나는 선생님이 전부였기에 그런 꿈을 꾼 거 같다. 아이들이 어릴 때 만나게 되는 어른들의 존재는 생각보다 큰 영향을 차지하게 된다.
연예인들의 자식들이 똑같은 연예인의 길로 들어서거나, 스포츠 선수들의 자식들이 스포츠 선수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TV나 책에서 간접적으로 만나는 어른들의 영향도 많이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내 주변 어른들의 영향은 훨씬 크게 와닿는다. 가끔 내가 다양한 어른들, 좋은 어른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다르게 자랐을까? 생각하게 된다.
특별히 엄청 좋아했던 일이나 내가 잘할 수 있는 전문적인 분야를 만나지 못했던 나는 커리어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온 듯하다. 속된 말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이것저것 얕은 지식만 지닌 채 50년이 지나가버린 기분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좋아하지만, 지금 내 나이 50에 이제 와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라는 꿈을 갖기엔 또 많이 늦어 보이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한다.
그래도 내가 살고자 하는 말년의 마지막 내 모습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것도 꿈이라면 꿈이겠지만..
요즘 근력 운동만큼은 제대로 해보자고 결심해서 일주일에 3번 이상은 바벨, 덤벨 및 HIT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학교 운동부 언니라도 된 것처럼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고, 조금씩 근육 키우며, 땀 흘리는 재미를 새삼 느끼며 산다. 우리 클래스의 젊은이들 틈 바구니 속에 머리도 희고 주름도 많아 보이는 나이 지긋하신 노인분들이 몇몇 오신다.(할머니라 하기엔 너무 건강한^^) 겉모습과 달리, 들어 올리는 덤벨 중량이 내 2배는 되고, 덤벨을 들 때도 얼굴에 힘 하나 안 들이고 번쩍번쩍 드신다. 누워서 다리를 들어 올릴 때도 나보다 훨씬 곧게 펴서 스트레칭하신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주 힘도 세고, 건강해서 은색 머리를 휘날리며 러닝 10km를 해도 거뜬한 체력을 가지고 싶다. 웃으면 고운 치아가 여전히 건강하게 드러나 먹는데 문제가 없고, 몸매도 변하지 않아 50대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싶다.(아.. 지금보다 날씬하면 더 좋고 ㅎㅎ) 레깅스에 배 근육이 살짝 드러나는 러닝셔츠를 입어도 전혀 굴욕스럽지 않고 멋진 할머니면 좋겠다.
나와 남편이 나이가 들어서 둘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참 축복일 것 같다.
아이들이 없어도 뭔가 허전하지 않고 외롭지도 않고 꽉 찬 느낌이 드는 노년의 삶이라면 나쁘지 않다.
아이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반평생을 요리하다 보니, 나중에 둘만 살 때는 서로서로 한 끼씩 요리를 해주면서, 주부와 남편의 경계를 허물고 싶다. 내가 망치질을 할 수 도 있고, 남편이 빵을 만들 수도 있고 말이다. 아들이 셋이니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그중 한 커플 정도는 사돈 부부가 우리 부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면 좋겠다. 근처에 살면서 아이들 빼고 넷이서 같이 여행도 다니고, 밤마실도 함께 다니며 커피 한잔 나눌 수 있는 그런 좋은 절친으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 (그렇다고 도시와 떨어지는 건 또 싫은 나지만)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넓은 테이블이 있는 뒷마당에서, 방금 만든 따뜻한 빵에 무화과잼을 발라먹고, 바쁠 일 없이 여유 있는 아침에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아침을 먹고 싶다. 마당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보기만 해도 설레는 마당을 갖고 싶다.
남편이 육체적으로 힘든 일 하지 않고, 돈 걱정 없이 그토록 원하던 그림 그리며, 좋아하는 가구 만들며, 강아지 산책 시키면서 사는 삶을 살게 하고 싶다. 평생 우리를 지켜줄 것만 같은 골든 레트리버가 옆에 와 앉아 졸린 눈으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라도 평소 책 읽는 것을 놓지 않고, 작은 노트북으로 지금처럼 나의 일상을 쉼 없이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여전히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틈틈이 공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비브라토는 쌉가능한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손주들이 할머니 공연에 꽃다발 가지고 보러 와 준다면 너무 행복하겠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처럼, 기타를 딩가딩가 튕기며 허스키하면서도 나직한 목소리로 Moon River를 부를 수 있고,
"러브 어페어"에 나오는 캐서린 햅번처럼, 굽은 손가락으로도 러브 어페어 한곡 정도는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할머니이기를...
소박하지만, 이게 나의 마지막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