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클래식 이야기
지난주 토요일, 캘거리 한인 오케스트라에 입단 후 첫 연주회가 있었다. 교회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서 우리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순서를 장식했다.
공연곡은 세 곡이었지만 준비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올해 9월에 오케스트라에 입단 하자마자, 내년 5월에 있을 정기공연곡뿐 아니라 11월, 12월 공연을 위해 매주 새로운 악보가 쏟아져 나왔고, 개인적으로는 스즈키 4권 수업도 계속 병행해야 하니 덜컥 과부하가 걸렸다. 그 와중에 엄지손가락 관절염은 더 심해져 연습조차 점점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자, 겨우 이룬 꿈을 포기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깊은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은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라, 하나에 집중할 때'라고 마음먹고, 하고 있던 여러 활동을 과감히 정리했다. 간단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하나씩 정리를 해 나가니, 다행히 육체적 부담이 조금씩 덜해졌고, 정신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다이어트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오케스트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어 이번 연주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2022년 1월, 50이라는 늦은 나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지윤 씨와 '반짝반짝 작은 별' 같은 곡을 낑낑거리며 연습하던 때에도 "우리도 먼훗날 캘거리 한인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자"라고 말했었다.
지윤 씨는 "당연하지~" 하며 농담처럼 웃었지만, 내 마음속에서 그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 꿈이었다.
큰아이 준혁이가 아주 어렸을 때, 아이가 클래식과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처음엔 준혁이가 클래식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노 음반을 틀어놓으면 노래가 나오지 않으니, 다른거 틀어달라고 하기도 했는데, 자꾸 듣다보니 어느샌가 익숙해졌던 것 같다. 어느날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엄마, 이건 바이올린이야?" "이건 클라리넷?" 하며 책을 가지고 와서 묻기도 했다.
특히, 프로코피에프의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는 준혁이가 클래식에 폭 빠질 수 있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된 음반이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동화 구연을 해주는 음반으로 준혁이 갓난아이였을때 영어버전으로 자주 틀어주었다. 그런데, 우연히 라디오에서 조수미가 "피터와 늑대"를 한국어로 구연 해주는 걸 듣게 되었다. 오케스트라 음악과 그녀의 맛깔스러운 능숙한 연기가 어우러져 한번만 들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장 한국버전 음반을 찾아 보았는데,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동화책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음반을 사 온 첫날, 준혁이는 30분 정도 되는 곡을 꼼짝 않고 앉아서 들었다.
이 음반의 내용은 피터와 동물 친구들의 지혜로 늑대를 잡는 이야기다. 피터가 오리를 미끼로 쓰고, 새가 늑대의 위치를 알려주며, 결국 피터가 밧줄로 늑대를 덫에 묶어 사냥꾼이 올 때까지 붙잡아두고, 사냥꾼이 도와서 늑대를 마을로 데려가며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 속 모든 인물과 동물은 각각 오케스트라의 악기로 묘사된다.
새는 플루트,
오리는 오보에,
고양이는 클라리넷,
할아버지는 바순,
늑대는 3대의 호른,
피터는 현악 사중주로,
그리고 총소리는 케틀드럼과 큰북.
플루트 소리가 나오면 정말 새가 등장하는 듯하고, 웅장한 케틀드럼과 큰북이 큰소리로 울리면 사냥꾼의 총소리를 듣는 듯 실감나게 묘사한다. 이런 재미있는 방법으로 오케스트라에 접근하니 아이들은 전혀 어렵지 않게 클래식을 듣게 되었고, 준혁이는 음반을 들으며 혼자 지휘 하는 흉내를 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놀았다.
<당시 준혁이가 피터와 늑대를 들으며 그린 그림)
"피터와 늑대" 다음으로 상생스의 "동물의 사육제"도 너무 좋아했다. 상생스는 악기의 특징을 잘 활용해서 동물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며 퍼레이드 하는 듯한 풍성한 음악을 만들었다.
준혁이가 첼로와 콘트라 베이스가 비슷하게 생겼다며 "첼로는 어떤 소리가 나요?"라고 묻길래 요요마의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을 틀어주었다. 그러자 귀를 붙이고 듣곤 했다.
준혁이의 이런 감성을 너무 잘 아는 친한 동생 지영이는 준혁이의 5살 생일에 "Summer Night Concert" DVD를 선물했다. 궁전 정원 앞에서 펼쳐진 빈 필하모닉의 라이브 공연 실황 DVD였다. 그 어린 아이가 장난감도 아닌 오케스트라 공연 실황 DVD 선물을 받고는 너무 좋아 넋 놓고 화면을 보고 있는 게 신기했다.
오케스트라 악단을 유심히 살피다가 "엄마~ 케틀 드럼 찾았다!" "바순이 저렇게 생겼구나~" 라며 집중했다.
저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게, 화면은 오케스트라 단원과 지휘자, 관객만 나오는 단조로운 구성인데도, 클라이맥스 때 터지는 금관악기와 바이올린의 명쾌한 멜로디가 어린 나이에도 깊이 감명받았었나 보다.
형이 좋아하니까 둘째 승환이도 삐꼬삐꼬(피터) 하며 CD를 가져와서 틀어달라고 했고, 둘이서 장난감으로 연주 흉내를 내며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이 어릴 땐 집에서 늘 음악과 함께였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놀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 후로는 "사운드 오브 뮤직", "캣츠", "레미제라블" 등 뮤지컬 영화에도 한참을 빠져 살았던 우리 아이들. 그래서인지 승환이는 커서도 뮤지컬 영화를 너무 좋아하고 인생영화가 "라라랜드"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꼭 밴드가 있는 학교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처럼 한국은 밴드가 있는 학교가 흔하지 않았고, 결국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다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그걸 이루었다. 캐나다는 학교마다 밴드가 있어서 어릴 때 악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5~6학년 즈음엔 누구나 학교 밴드에서 활동하며 악기를 배울 수 있다.
준혁이는 6학년이 되어 트럼펫으로 밴드를 시작했다. 매일 20분씩은 꼭 집에서 트럼펫을 연습했다. 특히 밴드부에서 실력 있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어서, 공연때 솔로 연주도 실수 하나 없이 해내며 재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 캘거리로 이사 오면서 친구들도 모두 바뀌고, 트럼펫을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과 다시 기초부터 시작하게 되어서인지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렸다. 8학년때부터 준혁이는 더 이상 트럼펫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아들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될까?
지금은 두 동생들 역시 트럼펫으로 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인생에 악기하나 정도는 배우게 해주고 싶은게 엄마 마음인데 끝까지 이어질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우연한 기회로 배우게 된 바이올린으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 아이들이 아닌 정작 나라니. 아이들을 향한 엄마의 작은 소망이, 결국 나 자신의 꿈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사람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4년 전만 해도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동떨어진 악기였으니까.
나는 어릴 때도 음악을 좋아했지만, 악기를 배울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다, 5학년때 사촌 숙모님이 피아노 학원을 오픈하셔서 2년 정도 다닐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 두 정거장을 걸어가야 했는데도 너무 신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을 찾았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공부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어, 어중간한 실력으로 멈춘 것이 늘 아쉽다. 그때 피아노가 아니라 바이올린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함께 연주한 바이올린 선생님들의 소리와 손놀림은 너무 아름다웠고, 그 모습이 깊은 존경으로 다가왔다. 성인이 되어 뛰어나게 연주하는 분들은 대부분 아주 어릴 때부터 배운 분들이다. 실력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연주한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의 연주도 내가 쉽게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는 특히 어릴 때 시작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첫 공연을 마치고,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연 영상을 보다보니,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즐기던 음악들과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이 떠올랐다. 집 안에서 늘 흐르던 클래식 음악들. 그 모든 순간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늦게 시작했지만, 꾸준히 음악과 함께한 시간이 결국 무대까지 이어졌다는 것에 새삼 행복함을 느낀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만큼, 내 손이 허락하는 한, 음악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자리 잡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나만의 속도로 음악을 이어가고, 언젠가 아이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