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겨울

by 고들정희

부산에서 나고 자란 우리 가족에게, 캐나다의 눈은 신기한 존재였다.

부산은 워낙 눈이 내리지 않는 도시여서 "부산에 몇십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가 나올 때를 제외하고는 눈 없는 겨울은 우리에게 아주 평범하다.

결혼하던 그 해 겨울,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눈이 내린 적이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신혼집 앞 초등학교 언덕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쌀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고 있었다.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도시였으니 눈썰매가 있을 리 만무하다. 누군가 시작한 쌀포대 썰매로 동네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아침부터 하얀 눈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웃에서 빌린 투박한 쌀포대 하나를 들고 언덕에서 한참을 미끄러지고 소리 지르며 오랜만에 아이가 된 것처럼 놀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우리였으니, 캐나다에 이민 와서 만났던 눈은 행복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영하 40도를 찍던 날, 우리는 일부러 무장으로 하고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냉동체험"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1분도 안되어 눈썹이 하얗게 변한 모습이 재미있어 사진으로 남기며, 마치 관광객이 된 듯한 기분으로 살았던, 캐나다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던 때다.


하지만, 그 낭만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이민 초반에 살던 타운하우스에 가라지가 없어 겨울에 차를 밖에 주차해야 했는데, 아침이면 밤새 얼어붙은 유리에 낀 서리를 녹이기 위해 출근 30분 전엔 미리 시동을 걸어 차를 데워야 했다.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워 길을 내고, 차 위에 소복이 쌓여있는 눈을 매번 치우는 것도 큰 일이었으며, 차 유리 위에 꽁꽁 언 얼음을 스크레퍼로 깎아 내는 것도 요령이 필요했다. 이렇게 차에 쌓인 눈을 다 치우고 나면 한겨울에도 이마에 땀이 날 정도였다. 겨울이면 매일 아침 눈과의 전쟁을 벌인다.


한 번은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데려다주다 꽈당하고 미끄러진 일도 있었다. 캐나다의 빙판길을 접해보진 못한 내가 바닥이 매끈한 미끄러운 부츠를 신고 빨리 달리다, 순간 신발이 미끄러지며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너무 아파서 눈앞이 노래졌다. 그 후론 신발을 살 때의 첫 번째 조건이 미끄럽지 않은 아웃솔을 고르는 것이다.

겨울의 눈길 운전 또한 두렵다. 겨우내 도로의 눈이 차곡차곡 다져져서 스키장 바닥처럼 미끄러워지면, 브레이크를 밟아도 차가 서지 않는 미끄럼을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땐, 내 심장도 따라 미끄러지고, 그 후부터는 운전이 너무나 떨리고 두려운 일이 된다. 특히, 바람이 많이 부는 밤에 운전을 할 때면 바닥에 있던 건조한 눈이 하얀 돌풍을 일으키며 컴컴한 도로에 하얀 유령처럼 흩날리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으스스하다.

이제는 눈길운전 10년이 넘어 어느 정도 베테랑이 되었지만, 매년 겨울이 시작되면 다시금 숨어있던 두려움이 올라와 초보운전자처럼 운전대를 꽉 쥐게 된다.


처음 이민 왔을 때는 겨울이 거의 6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다. 10월부터 추워지며 눈이 내리고, 그 추위가 3월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다 보면 겨울 내내 입고 다니던 패딩이 슬슬 지겨워지며 "언제나 겨울이 끝날까?" 생각하게 되고, 이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3월 즈음 눈이 녹기 시작하면 길은 진흙과 얼음이 뒤섞인 슬러시가 되어 버린다. 깨끗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은 소용이 없다. 차 바닥에는 신발에서 떨어지는 물 때문에 무조건 고무 매트로 깔아 두는 것이 기본이다. 야외 주차장에서는 눈을 치우면서 쌓이게 된 눈더미가 곳곳에서 산을 이루는 신기한 풍경도 보게 된다.


그랬던 캐나다의 겨울이 지금은 10년 전 이민 왔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

지구 온난화를 실감할 정도로 정말 많이 따뜻해졌다. 영하 35도 이하에만 꺼내 입는 제일 두꺼운 겨울잠바는 안 입고 건너뛰는 해도 많아졌다. 11월에도 눈을 거의 볼 수 없고, 12월 조차도 눈이 내렸다가 녹았다를 반복한다. 오히려 이젠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를 기다리게 된다. 눈이 오지 않는 크리스마스는 왠지 아쉽다. 요즘의 캐나다 겨울 날씨라면 극강을 견뎌야 하는 수준이 아니어서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문제가 나비효과로 돌아와 지구를 커다란 위험에 빠지게 한다는 걸 알고는 있으니, 이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 지도 알지만.


그래도 눈 내리는 날에 집콕하며 바라보는 눈 오는 날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아이들과 함께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면,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전등이 불빛을 밝히고, 나무들은 하얀색 코트를 입고 분위기를 더한다.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틀어놓으면 괜스레 설레는 마음이 들고 기분이 좋아진다.

눈 없는 겨울은 얼마나 심심하고 밋밋할까. 마치 코코아에 마시멜로가 빠진 것처럼.

그래... 겨울은 눈이 있어야 제맛이다.

세상에서 눈이 없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면, 후세에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차갑지만 따뜻하고, 가볍지만 무겁고, 손으로 만질 수 있지만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


겨울이면 따뜻한 겨울부츠를 꺼내고, 비니를 푹 눌러쓰고 뽀드득 소리 내며 눈길을 걷는 낭만이 분명히 있다.

밴프에 가서 청량한 하늘과 대비되는 설산을 바라보고, 한겨울 뜨거운 야외 스파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도 차가운 눈이 없다면 그 매력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올해 겨울엔 많이도 말고, 이런 낭만을 즐길 만큼만 눈이 와주면 참 고마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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