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시리즈] 2. 안녕, 나의 처치 곤란한 보물들

by 고들정희

큰 결심을 했다.

지하 창고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아이들의 한글 전집들을 드디어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한국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책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엄마의 마음에 매달 돈을 아껴 새 전집을 들였었다. 거실이 도서관처럼 변할 만큼 책을 사랑했던 아이들. 아이들은 책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자랐고, 11년 전 캐나다로 이민을 올 때도 나는 그 책들을 차마 포기하지 못해, 20박스가 넘는 책 상자를 해외 이사로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영어책에 더 익숙해졌고, 한글책은 읽는 용도가 아닌 꽂아두는 장식품이 되어버렸다. 한창 책 읽는 습관을 들일 즈음 영어책으로 넘어오면서 원래의 독서 습관도 무너져버린 게 가장 아쉽다. 2학년 때 이민을 왔던 큰애는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손때 묻은 책장을 넘기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그때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고, 그 소중한 추억들이 담긴 책들을 돈 몇 푼과 바꾸고 싶지 않아 처분할 수 없었다. 몇 년간 손도 안 대고 있는 한글책인데도 '나중에 손주들이 읽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과 미련을 붙들고 있기를 10년째.. 그동안 책들은 고스란히 지하의 짐이 되었다. 지하개발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을 때도, 아이들 책이 먼저 눈에 밟혔고 어서 정리해야겠는데 하면서도 늘 ‘내일 하지 뭐’ 하며, 맘속 깊은 곳에서는 보내기 싫었던 마음 때문인지 자꾸 미루게 되었다.

책은 왜 이렇게 보내기가 힘든 건지..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친 질문 하나가 있었다.


‘만약 내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쓸데없이 진지한 생각이라 하겠지만, 남겨진 가족들이 내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옷이나 주방용품이야 누군가 나눠 갖거나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천 권이 넘는 이 무거운 책들은 내가 아니면 안 되었다. 나처럼 가치를 아는 사람이 없고, 나만이 처분할 수 있는, 오직 나에게만 소중한 ‘처치 곤란한 보물’이었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기쁘게 치워줄 수 없는 이 아이들을 만약 남겨두고 떠난다면 누군가에겐 큰 짐이 될 것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둔 것들이 한낱 방치였음을 깨닫자 신기하게도 몸이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지하에서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그 가치를 알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자. 그게 이 책이 다시 살아 숨 쉬는 방법이야'


책정리를 결심하며 함께 경제 공부를 하는 멤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집안의 불필요한 물건들을 팔아 '부수입 계좌'를 만들고 1년 뒤 시드머니를 가장 많이 모은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이참에 집도 정리되고 좋지 않아? 2026년엔 좀 가볍게 살자!"라고.

물론, 나는 첫 번째로 책을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같이 시작하는 멤버가 있으니 동기부여도 되고, 같이 목표를 정하니 의욕도 생겼다.


해빗 트래커에 ‘일주일에 하나씩 집에서 잠자고 있는 물건 정리하기’를 적어 넣고 우선 전집 7종부터 올렸다.

1차로 올릴 책권수를 세어보니 거의 300권 정도 되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사진 찍어, 장터에 글을 정리해서 올리는 과정은 생각보다 귀찮은 노동이었다. 한국에서 수십만 원씩 주며 설레하며 샀던 책들을 이젠 한 세트당 20불-30불, 그야말로 선물 같은 가격에 내놓았다.

빳빳한 새것 같은 커버에다 속지도 찢어진 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읽은 책들이었다. 남자아이들이지만 다들 순해서인지, 책장을 넘길 때도 조심히 넘기고 낙서하나 하지 않았었다.

상태도 좋고 가격까지 높지 않으니 광고를 올린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빛의 속도로 연락이 왔다.

전집 7종 외에 다음에 천천히 올릴 예정이었던 책들도 미리 구매의사를 주셔서, 추가 광고를 올리기도 전에 이틀 만에 내가 팔려고 했던 책들을 모두 팔게 되었다.


'이렇게 빨리 팔릴 줄 알았으면 가격을 좀 더 높게 책정할 걸 그랬나?"


안 팔리면 어쩌지를 걱정하며 한껏 낮춘 가격이었는데, 구매 희망자가 줄을 잇는 걸 보고 내가 물건 가치를 너무 몰라줬나 싶어 잠깐 후회가 되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만약 좀 더 비싸게 올렸으면 누군가는 구매를 주저했을 것이고, 나는 팔리지 않는 광고글을 며칠씩 확인하며 '왜 안 나가지?" 하고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지지부진하게 광고를 붙들고 있을 '시간'과 언제 치우나 고민하며 낭비했을지도 모를 내 '에너지'를 생각하면 훨씬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또한 돈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소중한 가치 아닌가. 덕분에 그 에너지와 시간을 다른 곳에 집중하며 쏟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 딜은 꽤 성공적이었구나 싶다. 나는 최단 시간에 내 삶의 공간과 여유를 되찾은 셈이 되니까.


직접 책을 픽업하러 오신 책 구매자들은 다들 선하고 좋으신 분들이었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서 그랬을까?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설레어하며 책을 가져가셨다. 아이랑 같이 온 한 가족은 이제 한글책 부자가 된 것 같다고 너무 좋아하며 행복해했다. 내 소중한 책들이 이제야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는구나 느껴서 나도 기뻤고, 이제는 진심으로 책을 잘 떠나보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거 같다.


이틀 사이 집에서 잠자던 1200권의 책이 새로운 주인을 만났고, 통장에는 600불이 찍혔다. 기부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정리했기에 한 권에 50센트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으로 팔았다. 이제 책장은 비워졌고 비로소 내가 미루어두었던 정리를 시작하는 첫걸음을 뗐다.

아이들의 책은 내게 추억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언젠가는 마쳐야 할 숙제였다. 그 숙제를 끝내고 나니 이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마음의 체력이 생겼다. 비워진 책장만큼 내일이 좀 가벼워졌다고 할까.

너무 빨리 판매종료돼서 한 권도 구매할 기회를 못 가지신 분이 문자를 보내셨다.


"좋은 책들,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거의 그냥 나눔 하시듯 내놓으셔서 다들 설레었을듯해요^^"


책 주인을 찾아주길 잘했어.

집에 꽂아두고 매일매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게 될 그 책들로 행복해할 아이들, 아이들이 거실바닥에서 책 삼매경에 빠져있을 풍경들을 생각하니 우리 아이들의 어릴 때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 설레고 뿌듯했다.


자, 이제 다음은 무엇을 비워볼까.

비워낸 자리마다 새롭게 채워질 미래가 벌써 설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크리스마스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