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워크숍] 5. 캐나다 이민이야기

by 고들정희

첫째를 낳은 뒤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전념하고 있던 내게, 남편의 두번째 실직은 곧바로 생계의 위기로 다가왔다. 남편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디자인 외의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디자인 회사를 다니며 두번의 실직을 겪은 뒤 그는 더 이상 디자인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대학 시절 그렸던 그림이며 스케치북 하나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마음이 더 아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며, 어떤 일이든 일단 해보자고 말했다. 속은 타들어 갔지만, 당장 생활이 걱정이었고, 살아야 했으니까.


남편은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보겠다며 인테리어, 목수, 도배 같은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실직자를 위한 정부 지원 교육 프로그램도 찾아다녔다.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교육을 마친 뒤에는 조금씩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 처음 도전하는 새로운 분야는 쉽지 않았다. 초보 기술자의 수입이 넉넉할 리도 없었다. 일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나도 겨우 일당 6만원. 그 무렵 남편의 체중은 눈에 띄게 줄었고, 우리 집 통장 잔고도 함께 줄어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걱정을 오래 붙들고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도배도 결국은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 아니겠냐’ 며 애써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우연히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캐나다라는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 캐네디언과 결혼한 내 친구가 캐나다 할리팩스에 있는 시댁에 다녀와서 올린 카카오 스토리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사진을 보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 사진 한 장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여러 조건과 상황이 겹친 결과였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그 사진이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민이라는 단어가 그날 처음 현실적인 모습으로 떠올랐다.


한국에서 아들 셋을 낳았다. 아들이 셋이라고 하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거나 ‘동메달도 아닌 목메달’ 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대부분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부산에서만 40년을 넘게 살았고, 같은 동네에서만 20년을 보낸 사람이었다. 이 좁은 나라에서, 아들 셋을 키우며, 한 번도 다른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제는 이 우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게 살고 싶다면 살고 있는 환경부터 바꾸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민을 결심하고 나서는 정말 모든 것을 혼자 알아봐야 했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나이도 많고, 기술도 없고, 영어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돈도 없었다. 수천만 원을 요구하는 이민 대행사, 대학에 들어가 영주권을 노리는 방법 등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았고,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끝에, 정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해외에서 기술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에 글을 올렸다. 남편의 상황과, 캐나다에서 목수 일을 배워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적었다.


며칠 뒤, 그동안의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에서 건설업을 하는 한 사장님에게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한국인 직원을 찾고 있다. 이곳에서 건설일을 배우면서 이민을 고려해볼 생각이 있으시냐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그는 본인 회사를 소개하며 캐나다식 목조 주택을 짓는 건설 회사이며, 작지만 한인 건설업체로는 최고라고 자부한다고 하셨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남편의 생일이었다. 내가 바라고 원하던 것을 이렇게 생일선물로 보답을 받는 건가? 답을 기다리던 내게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사장님과 직접 통화를 마친 뒤 남편의 캐나다행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리자이나’ 라는 도시 이름도 그때 처음 들었다. 남들에게는 생소하고 별볼일 없는 곳일 수 있지만 우리에겐 기회의 땅인 것 같았다. 혼자 캐나다로 떠날 남편을 위해 노트북을 사고, 비행기 표를 끊었다.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리면, 미루지 않는 성격이라 더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정식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워크퍼밋이 나오기까지는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우리는 잠시 떨어져 지내야 했다. 한국에서 아이 셋을 혼자 키우는 시간은 힘들었지만, 이미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친정 엄마는 직장 생활을 하는 언니를 돕느라 조카들을 돌보아야 했고, 남편은 늘 밤샘 근무에 시달렸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독박 육아를 하고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나는 혼자서도 세 아이를 거뜬히 챙기는 단단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나는 내 모든 시간을 아이들에게 헌신했다. 집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간식을 만들어 먹고, 또 매일 바닷가와 숲으로 가서 놀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아이들과 지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가장 충만했고 행복했던 시간이기도 하다.


남편이 워크퍼밋을 받게 되자 나와 아이들도 캐나다로 건너갔다. 나는 우리의 첫 집이었던 정든 아파트를 팔고, 산더미 같은 짐과 한국에서의 기억들을 이삿짐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짧은 시간에 혼자서 다 해냈는지 여전히 아득하고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마침내 세 아이의 손을 잡고 떠나는 날, 친정 식구들이 모두 공항에 나와 우리 가족의 새출발을 축하해주었다. 어린 막내는 유모차에 태우고, 나머지 아들 둘을 손잡고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나는 끝까지 제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래서, 공항에서 가족들과 오랜 이별을 해야 하는데도 눈물 한방울이 안 나왔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열시간이 넘게 걸려 마주한 작은 소도시 리자이나의 첫 풍경은 낯설지만 포근했다. 공항에 마중을 나온 남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아담하고 깨끗한 타운하우스였다. 새 출발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마침 학교가 여름방학이어서 두 달 동안은 캐나다 생활에 적응하고 준비하며 보낼 수 있었다. 차가 없던 몇 주간은 아이들과 걸어서 장을 보러 다니고, 집 앞 공원 잔디밭에서 한가롭게 햇살을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번은 비를 피할 곳조차 없는 동네에서 비를 흠뻑 맞고 집까지 걸어서 돌아오던 날들이 생각나지만 그것조차 아이들에게는 놀이였다. 지금도 막내는 그 시절의 리자이나를 가끔 그리워한다.


이민 오기전에는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캐나다에 온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저 평화롭고 행복했다. 내가 늘 갈망하던 잔디 많은 나라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모습이 좋았고, 남들 시선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이곳에서 남편의 흙 묻은 작업복이 자랑스러웠다.


남편은 그 후로도 10년 넘게 캐나다에서 목수로 일하고 있다. 영주권도 받았고, 지금은 캘거리로 이사와 작은 주택도 마련해서 살고 있다. 43살 늦은 나이의 도전이라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그때 우리는 충분히 젊었다.


어쩌다 보니 캐나다에 와서 살고 있다. 수많은 굴곡 끝에 지금까지 왔고, 삶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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