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워크숍] 7. 멈춤 그리고 다시 시작

by 고들정희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나는 건강에 대해 자신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손만 아니면 너무 건강하다. 오장육부 어느 곳 하나 특별히 아픈 곳도 없고, 팔과 다리, 심지어 눈도 밝은 편이며, 상한 이 하나 없는데, 단 하나, 엄지 손가락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이야. 갱년기가 시작되며 양손에 퇴행성 관절염이 찾아왔고, 물건을 집거나 힘을 주면 통증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여러 번 주사를 맞았지만, 이제는 그 마저도 무디어진 듯 별로 효과가 없다.


몸의 한 군데만 아파도 정신은 금세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온다. 하필 왜 나에게 이런 통증이 찾아왔을까 불평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나는 불행에 매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통증이라면, 차라리 이 고통을 계기로 그동안 달려온 길을 잠시 멈추고 나를 다시 바라보기로 했다.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 이제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구분하는 법을 비로소 배울 기회가 온 것이다. 이 멈춤의 시간은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 이 아닌 앞으로 ‘내가 진정 원하는 가치'를 가르쳐주는 조율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4년간 바이올린을 배웠다. 꿈은 워낙 커서 기초반 때부터 캘거리 한인 오케스트라 입단을 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작년, 세컨드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합주에 합류했다. 하지만, 함께 연주를 해보니 나의 실력이 더 형편없다는 걸 느꼈다. 어릴 때부터 배우고, 10년 이상 전공자로 연주해 온 이들과 이미 성인이 되어 시작한 나의 4년은 그 격차를 줄이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실감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참으로 어려웠고 내 실력은 오래도록 늘지 않고 제자리였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은 사실상 없었지만, 여러 악기가 조화를 이루는 합주의 설렘은 포기할 수 없었다. 입단하자마자 매주 쏟아지는 새로운 악보와 개인 레슨의 과부하 속에서 엄지손가락 통증은 극에 달했다. 겨우 이룬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픈 손만 아니었으면' 하는 원망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라, 집중할 때'라고 마음먹고 바이올린 이외의 다른 활동들을 과감히 정리하며 오케스트라 공연 연습에 몰입했다. 덕분에 두 번의 크리스마스 공연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성취의 기쁨 뒤에 찾아온 것은, 더는 감당하기 힘든 통증과 멈춤에 대한 고민이었다. 5월에 있을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까지 소화하려면 최소 하루 2시간은 꼬박 연습해야만 겨우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증 있는 손으로는 무리였다. 이제 미련은 버리고 그만둬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그만둬야 할 순간에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선택을 실패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쏟은 열정과 시간이 아까워 비효율적인 집착을 이어가는 매몰비용의 법칙처럼, 나 역시 바이올린에 쏟은 노력이 아까워 통증을 참으며 무리했다. 지금 포기하는 것은 마치 내가 실패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만두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늘 미련과 집착이 따라다닌다. 미련을 버리고 더는 이 악기를 지속할 수 없음을 인정하자, 그제야 바이올린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래도 꿈꾸었던 오케스트라 무대를 경험해 보았으니, 꿈은 이룬 셈이다. 이제는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또 다른 기회를 만들면 될 일이다. 바이올린뿐 아니라, 기타도 마찬가지 이유로 그만두게 되자, 음악을 즐길 다른 방법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거실 한편의 디지털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노라면 손으로 들고 하는 악기보다는 엄지손가락에 무리가 덜 갈 것 같은데? 초등학교 때 체르니 30번을 배우다 멈추었던, 늘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만들지 못했던 악기가 아니었나.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피아노가 새롭게 보였다. 사실 피아노야말로 내가 평소에 정말 잘하고 싶었던 악기였는데 정작 내관심은 딴 데 가 있었고, 오랫동안 외면받고 있었다. 돌보지 않아 쌓여버린 먼지를 닦아 내고 건반을 가만히 눌러보니, 다행히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악기가 생긴 건가? 갑자기 내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며 설레기 시작했다.


비워낸 자리에는 분명 또 다른 꿈이 피어나게 된다. 지금 나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야 하는 깊은 사색의 지점에 서 있다. 통증은 나에게 많은 것을 멈추게 했지만, 그 멈춤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곤 한다. 내게 삶을 몰아붙이던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는 내 몸의 속도에 귀를 기울이며 느리게 배움을 이어가려 한다. 이 멈춤은 끝이 아니라, 남은 인생을 더 정확한 속도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조율이다.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 54세의 나는 늦깎이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게 되었다. 80살에도 Love affair를 멋지게 연주하는 할머니가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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