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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넷,
두려움 없이 뛰어들다 (1)

Jump out of the bus!


막무가내로 이 곳에 더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물컹물컹해져 있던 마음이 해안 절벽에 자리한 아름다운 마을을 본 순간 더운 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예쁘게 깍둑썰기 되어 층층이 자리한 집들, 오래된 계단 길과 일렬로 죽 늘어선 빛바랜 화분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하얀 벽과 그 벽들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파란 바다 빛, 흩어진 레고 블록처럼 떠있는 작은 배들… 고개를 돌려 눈에 담는 모든 장면이 잘 찍힌 사진 같았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의자마저 멋스럽게 느껴졌다. 날씨는 어찌나 좋던지, 하얀 구름이 하늘을 가득 매울 기세로 절벽 끝에서 대책 없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 에너지만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투어버스가 이곳을 떠나기까지는 이십 분 남짓, 기념품을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기에 계속 머물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그때부터 몇 가지 걱정과 그것을 떨쳐버리려는 내면의 질의응답이 시작되었다.


‘투어버스로 네 시간이 달려온 이곳에서 로마까지 혼자 돌아갈 수 있는가?’

‘이 지역 사람들도 로마에 갈 것 아닌가! 그들이 가는 길로 가면 된다.’

‘여기서 머물 곳이 있는가?’

‘찾으면 어디라도 잘 데가 있을 것이다.’

“잠 잘 준비 없이 왔는데 괜찮은가?’

‘옷 하나면 낮도 밤도 지낼 수 있고, 잠자는 거야 말로 가장 준비가 필요 없는 행위 아닌가?.’ 

‘카메라 배터리가 오래 못 버틸 텐데...?’

‘카메라가 여행하는 것보다 내가 여행하는 게 더 가치 있지.’

‘씻을 도구는?’

‘씻는 건…’


그때 눈 앞의 기념품샵에 놓여있던 0.25유로짜리 레몬 모양 비누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야! 머무르지 않을 이유가 없어!”


마치 유도에서의 한 판처럼 쐐기를 박는 순간이었다. 레몬향이 폴폴 나는 비누를 사 들고 그 길로 가이드에게 가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뭐? 안 돌아간다고? 로마까지 어떻게 가려고! 그리고 여긴 관광지야. 미리 예약 안 하면 방도 없다고!”


“샅샅이 뒤지면 방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지금은 성수기라고. 게다가 여권 있어? 여권은 모든 숙박에 필요한 거 알지?”


“……” 


“그 봐, 너 못 가!” 


구멍이 숭숭 뚫린 무모한 계획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나도, 마을도 울게 뻔했다.


“아예 못 묶어? 방법은 없어?”


“나 참, 내가 그걸 왜 알려줘! 널 데려가야 하는데!”


“엇? 방법이 있는 거야?”


“… 어휴, 여권이 파일로 있다면 프린트하는 방법이 있긴 해. 사본은 받아 주기도 하거든.”


“오오, 여권사본! 인터넷이 된다면 파일을 받을 수 있어! 여기 프린트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다시 말하지만 모든 비앤비가 사본을 받아 주는 건 아니야!”


“왠지 될 것 같아. 여행하면서 안 사실인데, 나는 적당히 불쌍해 보이면서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아서 그런 데에서 유리하더라고!.”

가이드는 내 근거 없는 자신감에 기가 차 하면서 프린터가 있는 호스텔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고마워, 역시 베테랑 가이드! 여길 꿰고 있구나!” 


“칭찬은 됐어! 이거 뭐, ‘점프 아웃 오브 더 버스’라니. 가이드 8년 만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

그는 연락처를 주며 꼭 안부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돌아가는 차에 오르며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 그게 여행이지.”


방금까지 취해 있던 막무가내 모드에서 깨어나,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방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 알려준 대로 여권을 프린트하고 온 동네를 뒤지며 비앤비에 노크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며 본 마을의 예쁘장한 속살 같은 모습에 남 모르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오늘이랑 내일 방 있어? 없다면 소파라도 괜찮아." 

하루 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미안, 방이 없어. 아마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텐데…”


열 번 정도 퇴짜를 맞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조금 무모했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한 결정을 후회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 안되면 어디 해변 파라솔에라도 몸을 누이면 되지 뭐. 날씨가 더워서 추위에 떨 일도 없을 거야.’


대비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될 거야’하는 마음가짐이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또 그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일단 지금의 해결법은 계속 내려가며 문을 두드리는 거야.’ 


이번에도 방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비앤비 주인이 잠깐만 있어보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탈리아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꼬레아’라는 단어와 ‘유로’라는 단어, 그리고 나를 가리키는 제스처로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거기 방이 남아있어? 여기 한국 여자가 하나 있는데, 가지고 있는 돈은…”


지금 생각하면 내가 굉장히 딱해 보였던 것 같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혼자인 데다, 이미 몇 번의 거절을 경험한 듯한 절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그녀는 전화가 뜻대로 해결되지 않았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속으로 그녀를 응원하고 응원했다. 제발 포기하지 말기를! 

네 번째 통화를 하고 드디어 밝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나에게 방이 딱 하나 남은 곳을 찾았다며, 작은 호텔의 이름과 위치를 메모해 주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묶을 수 있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음을 크게 쓸어내리며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숙박업 주인장들 간의 네트워크라니, 이보다 멋진 해결책이 있을까! 


생각지도 못 한 방식으로 무언가가 해결되곤 하는 걸 보면, 생각지도 못 한 일들이 닥쳐 절망해야 할 때조차 의연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멀리서 점 같은 나를 지켜본다면, 우연히 일어나는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인생에서 한 치의 치우침도 없이 팽팽하게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평형을 깨고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다 놓기 위해 웃고, 노력하고,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이리라.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 씻고 나서 꾸르륵거리는 배를 잡고 밖으로 나왔다. 날은 완전히 어둑해져 마을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그 풍경을 담은 내 눈빛도 영롱하고 생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이 훌륭한 밤을 못 보고 돌아갈 뻔했다니… 주머니에 급하게 찔러 넣었던 레몬향 비누가 만져져 웃음이 났다. 당연히 숙소에 비누가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쓰지 않은 새 것이었다. 



‘사실 지붕이 있는 방에서 못 잘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 거지? 어디 건물 바닥이나 해변가에서 잘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 거야. 그래도 비누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 놓았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모험을 감행한 거지. 그랬어.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거야, 이곳이.’


그냥 풍덩 빠지고 싶었던 것 같다. 무조건 좋은 일만 일어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겁도 났지만, 최선을 다해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하려고 온 힘을 다해 뛰어드는 것.

도시에, 여행에, 사람에,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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