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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Feb 02. 2019

낙엽 여섯,
그들 삶의 문을 두드리다 (1)

빈틈으로 들어가기


칠이 많이 벗겨진 하늘색 문, 그 살짝 열린 틈으로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책상 위 나무토막, 어질러진 공구와 널린 톱밥들, 벽에 걸린 옷과 도구들… 무언가를 만드는 제작실 같았다.  요리조리 기웃거리다 기계 앞에 앉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손을 살짝 들어 인사해준 덕에 조심스럽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구경해도 돼?’ 하는 제스처를 짓자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껑충하고 문턱을 넘었다. 그들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우와, 우와 거리며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안쪽에는 기타를 닮은 처음 보는 악기들이 일렬로 걸려있었다. 악기를 직접 만드는 곳인 것 같았다. 악기 이름은 바흘라마라고 했다. 바흘라마. 

갸름한 얼굴에 동그란 예쁜 뒤통수를 가진 악기였다. 나뭇결이 예쁘게 살아있어 곱게 머리를 빗어 묶은 모양 같았다. 터키 여기저기 간판이나 문가에서 본 꼬부랑 무늬, 그런 무늬로 된 띠를 두르고 있었다. 소리가 나오는 구멍마저 전통문양으로 파여있어 이 나라를 그대로 축소해 만든 대표 미인 같았다. 줄을 퉁겨보니 우쿨렐레와 비슷한 무게의, 그보다는 낮은 소리가 났다. 


호기심에 안쪽 방까지 기웃거리다 마중 나온 바흘라마의 하모니와 마주쳤다. 방 안에는 주인아저씨와 그의 친구가 바흘라마를 퉁기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빙 둘러진 오래된 소파, 난로와 포트, 손잡이가 없는 유리 찻잔, 작은 냉장고, 어질러진 책상, 그리고 시멘트 벽. 어떤 아지트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주인아저씨 우스타는 문 두 개를 뚫고 아지트에 쳐들어온 동양인을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바흘라마 소리가 좋다는 말에 멋들어지게 한 곡을 더 더 뽑는 우스타.


‘너도 한 번 쳐볼래?’를 시작으로 우리의 하드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이래 봬도 기타를 몇 번 뚱땅거린 적이 있는 나야. 잘할 수 있지 않겠어?’라는 생각으로 자신 있게 예스를 외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생각을 하라고!’와 ‘치킨 주둥이를 기억해!’였다. 손가락의 면으로 누르지 말고, 손가락을 바짝 새워서 콕콕 눌러야 한다는 애타는 가르침이었다. 그가 손수 그려준 운지법을 보며 한 음 한 음 퉁겨 곡을 연습했다. 그러는 동안 아지트에는 동네 음악 좋아하는 아저씨들이 하나 둘 모여 소란해졌다.



“에미넴, 에미넴. 나의 사랑스러운 여인.

나의 포도밭으로 놀러 와요.

푸르러진 산과, 푸른 옷을 입은 에미넴.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을 다정하게 사랑하고,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설탕처럼 달콤하다 얘기하죠.”


짝짝짝 짝짝짝! 삼십 분 후에 나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터키 노래인 ‘에미넴’이라는 곡의 노래 1절과 바흘라마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저는 십 년간 이즈미르에서 바흘라마만 쳐온 레아라고 합니다. 제 작은 공연에 와주신 걸 감사합니다.’ 하는 너스레와 함께. 훌륭한 연주도 아니거니와 따라 불러 주다가도 내 손가락이 꼬일 때면 그들도 함께 숨을 참아줘야 했지만 더없이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 가사는 꼭 너를 위한 것 같아.”


“오, 나도 이 가사가 마음에 꼭 들어! 고마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주다니."


"나야 말로 내쫓지 않고 환영해주어 고마운걸. 거기다 이것 봐, 엄청난 연주 스킬을 습득했다고!"


“짧은 시간 안에 연주를 해내다니 대단해. 레아, 조금만 기다릴 수 있겠어? 너에게 바흘라마를 선물하고 싶어.”


“정말? 나한테?!”


이런 설레는 제안이라니, 비쌀까 걱정이 되어 선뜻 응이라고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미 고개는 위아래로 새 차 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오후, 예고도 없이 찾아온 방문객에게 자신들의 일상을 내어주고, 손수 만든 선물까지 선뜻 주겠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호기심에 딱 한 걸음을 내디뎠는데, 이들은 열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 주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 문을 열고, 기꺼이 침입당할 준비가, 친절을 마음껏 발산하고 함께 즐길 준비가. 요이 땅! 하고 외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을 쏟아내려고. 


우스타의 아들인 유미르가 바흘라마를 만드는 동안 나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들의 모습을 종이에 담았다.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얀 베레모를 멋들어지게 쓴 오메르씨가 잼배를 끌어안고 가장 자신 있는 각도를 선보이고 있었다. 귀여운 이빨을 드러내 해맑게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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