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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Feb 16. 2019

낙엽 일곱, 한국전쟁을 기억하다 (1)

그날의 기억


영국 할아버지 레이몬드는 육십 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어느 멀고 작은 나라의 군의관으로 자원했다고 했다. 그가 지냈던 곳은 임진이라고 불리는 강 옆, 장막으로 만들어진 처소였다. 여름은 무진장 더웠고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하지만 까막산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은 유독 아름다웠다.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가까운 곳에서 전쟁이 발발했다거나 폭탄이 터졌다거나 하는 죽음의 위협을 느낀 적은 없었다. 단지 난로를 틀어 놓고 자던 동료를 잃은 일이 있었고, 아주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뜸하게 뉴스로 한국의 소식을 듣는다고 했다. 건물이 빼곡히 들어섰고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는 걸 알지만 아직도 임진강 주변에는 허허벌판과 마른풀들, 그리고 꾀죄죄한 까만 눈망울의 아이들과 강가에 빨래를 하러 나온 아낙들이 있을 것 같다. 


레이몬드는 동양인을 볼 일이 없는 영국 시골에 사는 탓에 가끔 여행지에서 까만 머리 여행자를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아내와 베네치아 여행 중에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고 단번에 한국인인걸 알아보았고, 나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한국인이냐는 질문에 놀란 건 내쪽이었다.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하는 질문은 많이 받아 봤지만 한국인이냐고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뭐, 그 후에 한국전쟁 참전 이야기에 까무러치게 놀란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우리나라를 위해 한국에 와줘서 고마워요."


나의 진심 어린 말에 그는 머쓱해하며 웃어 보였다. 


인사를 나누며 영국 시골에 꼭 가보고 싶었다며 놀러 가겠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오게 되면 또 만나자, 명함 하나를 남겼다. 숙소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국, 영국, 이탈리아, 지금과 과거. 경계가 허물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60년 전 그의 의지가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 돌다리 위에 서 있는 것도 누군가의 노력과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네치아. 치아처럼 늘어선 색색의 건물 사이로 좁은 물길이 활발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위의 작은 다리에는 마치 육십 년 전의 어떤 바람이 불어온 듯 잠시 훗훗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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