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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Feb 26. 2019

낙엽 일곱, 한국전쟁을 기억하다 (2)

남자는 위험해!

(이전글과 이어집니다)


“정말로 올 줄은 정말로 몰랐어!”


기차역까지 마중 나온 샬롯과 레이먼드는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안아 주었다.

샬롯의 집은 클리버리의 기차역에서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차로 한참을 더 들어가야 나오는 마을이었다. 한 겨울인데도 잔디에는 풀을 뜯는 양이랑 검은 소가 있고, 언덕을 넘을 때마다 둘레가 큰 나무들이 떡하니 서있어 그야말로 전원이구나 싶었다. 겹겹이 쌓인 언덕을 넘고 오르고 넘고 오르기를 반복해 드디어 샬롯이 사는 언덕에 도달했다. 그들이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다. 키 작은 붉은 벽돌집들이 검정 스머프 모자를 쓰고 오밀조밀하게 모여 사는 마을. 마을 한 켠에는 긴 고깔을 쓴 요정이 이 마을 전체를 지키듯 우뚝 서 있다. 아침이면 가느다란 마법봉을 휘둘러 금빛 행복 가루를 뿌릴 것만 같은 모습으로.



호텔도 민박도 없는 시골. 

내가 묶기 위해 예약한 곳은 펍에서 운영하는 숙소였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펍으로 내려왔다. 펍이 숙소라니, 펍이 숙소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펍의 역할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말을 타고 언덕과 언덕을 넘어 이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날이 어둑해지면 펍에 말을 묶어 놓고 지친 몸을 음식과 맥주로 달래며 머물었을 이곳. 시골이라 아직 많은 것이 그대로인 이곳에서 몇 백 년 전의 정취를 만났다. 


숙소의 어드벤티지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일층에 내려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꿀꺽꿀꺽꿀꺽. 항상 맥주 첫 잔의 첫 입은 서너 모금을 멈추지 않고 마신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맥주잔을 ‘탁’ 내려놓고, 목에서 밀려오는 ‘캬’를 발산한다. 여기까지가 맥주 마시는 기쁨의 80%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맥주 첫 입을 떼고 나면 드디어 이 동네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펍에는 이른 저녁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몇 모금을 마시기도 전에 옆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게 되고, 주위에 몇몇 청년들도 모여들었다. 시골에서 동양인을 보는 일이 아예 없을뿐더러, 혼자 펍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신기해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레아라고 하고 한국에서 왔어.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었냐면…


“Leah!”


채 몇 마디를 주고받기도 전에 레이먼드가 나타났다. 자기네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나를 데리러 온 참이었다. 그가 얼른 나오라고 손짓해 나는 남아있는 맥주를 뒤로 한 채 급하게 인사를 하고 나와야 했다. 레이먼드는 펍에서 나오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펍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건 위험해! 여기는 남자들이 주로 오는 곳이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지. 앞으로 꼭 조심해. 되도록이면 1층에 내려오지 말고.”


나는 이 장면을 아주 특별하게 기억한다. 마치 졸업파티에 가서 이제 막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딸을 걱정하는 아빠 같지 않은가! 7개월 동안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지낸 나였다. 이런 작은 일탈을 걱정하는 레이먼드라니. ‘Leah!’ 하고 급하게 나를 부르던 모습은 정말 아빠의 그것이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간섭이 따뜻하고 고맙게 느껴져 뭉클했다. 물론 그 길로 꼼짝없이 붙들려 레이먼드의 집으로 가 멘델스 존의 음악을 들으며 홍차를 마셔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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