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다 살아나도 단벌 지키기
자동 출입구가 열리자 텅 빈 공항에 숙소에서 보내준 유료 셔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사가 내 이름을 종이에 써 들고 서 있는 것을 보니 눈물이 핑 돌며 안심이 되었다. 공항 직원이 약속을 지킨다면 우리 짐가방은 내일 같은 시간 비행기 편으로 도착해서 숙소로 배달될 것이다.
공항을 떠나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우리 차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차가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고산에서는 자동차 엔진 기능이 떨어진다는 걸 그때 알았다. 차창 밖으로 협곡 반대편 위아래로 빽빽하게 차 있는 집들이 촘촘한 픽셀처럼 보였다. 창밖 하늘이 뿌연 것은 새벽안개 때문인가? 공항은 해발 3600미터인 라파스(La Paz)보다 500미터나 더 높은 엘 알토(El Alto)라는 곳에 세워져 있다.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밖에서 메스꺼운 냄새가 새어 들어왔다. 잘 보니 공기보다 무거운 유해 가스가 협곡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라앉아 뿌연 것이었다.
스페인어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젊은 운전사 에디가 말했다. 고도에 적응해야 하니 최소한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코카 차나 마시면서 살금살금 움직이라고 한다. 볼리비아와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서 나는 코카나무 잎에서는 그 유명한 마약인 코카인을 추출해낸다. 코카 잎을 우려낸 차는 천연 각성제로, 뇌와 혈관으로 산소를 빠르게 공급시켜주는 성분이 있어서 고산병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 사람들은 차만 마시는 게 아니라 젤리나 사탕 등으로 가공된 것을 먹기도 하고, 아예 허리춤에 코카 잎 봉지를 매달고 하루 종일 잘근잘근 씹기도 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도 고산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인데 이방인은 오죽하겠는가?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며 어질어질하기까지 하다.
좁고 가파른 내리막길 한복판에 우리 차가 섰다. 숙소인 호스텔은 시내 중심지에 있는 '마녀의 시장'이라는 곳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분명 나는 전용 욕실이 있는 더블룸을 예약했는데 안내받은 방에는 욕실이 없다. 마당 맞은편에 있는 작은 뒷간이 우리의 욕실이었던 것. 천장에 샤워기 하나 달려 있는, 용변 용으로 쓰기에도 비좁은 곳이었다. 새벽 추위에서 풀려나지 못해 뜨거운 샤워가 간절했지만, 옷걸이도 없는 그곳에서 소중한 단벌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낭패다. 우리는 샤워를 생략하고 바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다.
덜거덕거리는 마당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남편이 깨기 전에 핸드폰에 끼울 심카드와 당장 쓸 칫솔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한없이 가파른 경사를 올라 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다양한 전통 복장을 한 토착민들이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조그만 가게들이 간판도 없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데다 각종 잡화상까지 길 밖에 죄 나와 있으니, 그곳이 그곳 같아서 헤매기 좋았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우리를 바래다준 운전사 에디는 어려서 부모님이 돈을 벌러 해외로 나가신 덕에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국어인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할머니와 원주민어인 아이마라(Aymara)로 소통해서 에디는 학교에 가서야 스페인어를 처음 배웠다고 했다. 볼리비아는 지금까지도 여러 언어를 섞어 쓰는데 전 국민의 28%가 쓰는, 우리에게는 잉카 언어라고 알려진 캐츄아(Quechua)가 대표적인 토착민 언어다. 에디 할머니가 썼다는 아이마라는 18% 정도가 쓰고 그보다 더 소수가 쓰는 구아라니(Guaraní)라는 언어도 있다. 진작에 스페인어를 공부해서 초급을 떼고 왔지만, 소용이 닿지 않았다. 영어는 기대도 못하고 그나마 스페인어라도 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다행인데, 내가 학원에서 배운 스페인어로는 어림도 없었다. 언어가 많이 달랐다.
심카드는 포기하고 구멍가게에서 칫솔과 치약을 사서 다시 호스텔로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어느새 일어난 남편이 대문 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안 되니 서로를 찾지 못해 걱정이 된 모양이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천천히 마을을 더 돌아보기로 했다. 차들이 덜커덕대며 가파른 길을 지나다녔다. 낡아서 배기가스 정화기가 없거나 있어도 제 기능을 못하는지 택시와 봉고차 버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까만 연기를 여우꼬리처럼 달고 다녔다. 지금까지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라파스가 공기 오염에 있어서는 단연 최악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우리처럼 매연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 한복판에서 음식을 팔고, 길에 서서 먹고, 아이들을 뛰놀게 하며, 장사를 한다. 사람은 어떻게든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고 자기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양 묵묵히 살아가는 법이니, 내가 여기서 나고 자랐어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사는 그대로 경험해보고 싶어, 일부러 골목마다 쏘다니며 생활상을 구경했다.
그러나 걸음을 뗄 때마다 가슴이 조이고 호흡이 가빠졌다. 남편은 평소 걸음보다 더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의를 주었다. 고산지대에서는 산소도 부족하지만 운동 근육 능력이 저하되어서 몸을 맘대로 놀리고 싶어도 그렇게 안 된다. 식욕도, 소화기능도 떨어진다. 하지만 미련한 나는 속이 계속 울렁거리니 ‘뱃속이 비어서 그런가 보다’ 하며 자꾸만 뭘 더 먹으려고 했다. 길에서 발견하는 것마다 신기하다고 사 먹었는데 옥수수 전분으로 만두처럼 빚어 속에 양념한 고기를 넣고 구운 살떼냐(Salteña)도 맛있었고, 그와 비슷하지만 구운 게 아니라 튀긴 뚜꾸마나스(Tucumanas)도 흥미로웠다.
좁은 골목에 앉아 국밥을 파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같이 쪼그리고 앉아 길에서 국밥을 사 먹는 모습에 궁금증이 일어, 나도 그 틈에 꼈다. 곰국보다 훨씬 진한 국물이 맛있어서 감탄했다. 그 안에 든 토란 같은 검은 야채와 감자, 그리고 흐물거리는 동물의 내장도 맛있다고 먹었다. 남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 숟갈도 맛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이상하게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귀에서 쿵쿵쿵 큰 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오한이 심하게 돌고 속이 울렁이며 구역질까지 났다. 몸 전체가 차가워져서 양말을 신고 외투까지 껴입은 채 자리에 누워보았지만 따뜻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매트리스에서 찬 기운이 등으로 올라와 침대가 흔들릴 만큼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아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끙끙대니, 남편이 사무실에서 빌린 물병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어 왔다. 물병을 껴안고 자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따뜻한 코카 차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이상한 상태와 기분에 놀란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게 우유니를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자고 징징거렸다. 남편은 졸음이 몰려오는지, 아무 말 없이 나를 토닥이다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는 먹는 걸로 해결을 보는 반면, 그는 잠으로 대처하는 사람이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내 훌쩍임이 묻혀버렸다. 나는 더 서럽게 울며 꽁꽁 언 발을 비비고 콧물을 훌쩍이다가 깜빡 졸았다.
잠결에 어금니 부분이 싸해져서 번쩍 눈을 떴다. 그 신호가 뭘 말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서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필 화장실이 방안에 없고 마당 반대편에 뒷간으로 따로 있다. 먹은 것을 전부 토했다. 중간에 옷이 젖어서 빨고 쥐어짜고 법석을 떨었지만 그 소란에도 남편은 눈 한번 뜨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축축해진 옷을 그대로 입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얼마 후 다시 어금니 쪽이 욱신거렸다. 이번에는 웃옷을 다 벗고 벌거벗은 채로 화장실로 빨리 뛰어갔다. 아침부터 먹은 게 다 나오는지 어마어마하게 토했다. 그제야 속이 편해진 나는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전날 토한 얘기를 하니, 남편이 ‘급체인지 모르고 고산병이라고만 생각했다’며 큰일 날 뻔했다고 토닥여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소화불량 역시 고산병 증상들 중 하나다. 지방질은 특히 소화가 안 되기 때문에 처음 라파스에 온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시면서 전분 위주로 식사를 해야 한다. 그것도 모르고 튀긴 빵에 곰국에 생선 튀김을 마구잡이로 먹었다니. 끙끙 앓을 때는 당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는데, 조금 살 만해지니 ‘그래도 우유니 사막은 보고 가야지’ 싶어 진다. 공항에서는 약속을 어겨서 아직도 짐가방이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단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