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 뉴스

[크크의 다시 읽기] #3

지성이면 감천은 개뿔

by 다시

허태균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 한국인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주체성, 가족 확장성, 관계주의, 심정 중심주의, 복합 유연성, 불확실성 회피.


"한국인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영향을 받는 대상이기보다 타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주는 주체로서 인식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절대 무시받고 못 사는 한국인의 주체성이다. 가족 확장성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모든 사회의 조직을 가족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국가, 회사, 학교, 지역사회에도 모든 가족과 같이, 무한 책임과 정의, 절대 신의 등의 원칙을 적용하려 한다.


또한 한국인의 행동은 집단주의보다는 관계주의의 원리를 따른다. 집단과 조직 속에서의 공식적인 역할보다는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는 그 행동 뒤에 숨겨진 마음, 그 심정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좋다고 해도 100퍼센트 믿지 못하고, 싫다고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심정 중심주의는 한국 사람끼리의 끈끈한 무언가를 쉽게 만든다. 복합 유연성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선택을 피하고 포기를 싫어하게 만든다. 모든 것은 서로 다 통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성향은 오히려 하나를 얻는 대신에 그 이상을 잃어야 하는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경시하고 꺼리는 불확실성 회피 성향을 보이는데, 이는 한국인의 결과주의적인 태도와 단기적인 성과를 중시하는 것과 맞물린다. 한국사회가 물질적인 만족과 객관적인 평가에 의존하면서 정신적인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바로 이런 한국인의 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어쩌다 한국인>, 40쪽)

20211129_f9995e4c8a1e54123c64427a572d7917.png 허태균 교수의 <어쩌다 어른> 강의 모습 (유튜브 '사피엔스 스튜디오' 캡처)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한턱 쏜다'는 행위가 실은 주인공 행세하며 자랑하려는 심리이고, 다른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니 민망한 헛웃음이 나온다. 입사했다고 득남 득녀했다고 한턱 쏘아보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을 테니까. 우리가 당연시해온 우리 일상 속 민낯이 400여 쪽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왜 도로 위에서 차를 세워놓고 핏대 높여 싸우고 있는지, 건배사로 '우리가 남이가'를 외쳐대는지, 너도나도 걸핏하면 '사장 나와!’ 하고, 군대 가는 걸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억울하면 끝까지 사과를 받아내야 하고, 그러다가 사과 한 번이면 모든 게 풀려버리고, '노오력'과 순혈을 찬양하며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지를 심리적 측면에서 명쾌하게 설명한다. 저자의 절묘한 표현력은 수년 전 인기를 끌었던 그의 TV 강연을 통해서도 입증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책을 읽으면서 일단 부끄러웠다. 설령 볼썽사나운 짓을 드러나게 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세상이란 저런 사람들이 이기는 것’이라며 자조했었다. 그리고 가끔은 가까운 동료들에게 그렇게 해야 성공한다고 속삭이며 조언하기도 했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한국인 특성이라고 한다. 비슷한 역사적 배경과 유전적 유사성을 가진 한 사회의 구성원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며 유사한 심리적 특성을 발전시킨다. 나의 심리적 특성과 행동은 아주 평범한 개인이 유사한 배경 속에서 유사한 사건들을 겪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만 남다른 줄 알았다는 사실도 부끄러웠다.


내가 뼛속 깊이 한국인이었던 것은 내가 매우 사회 순응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의 확인이기도 했다. 그렇게 순응하느라 불편해진 마음 때문에 심리학이 필요했었나 의심이 든다. 나 같은 독자를 예상한 듯 저자는 말한다. 한국의 심리학은 이제 '내가 왜 그랬는데'를 이해하고 ‘그래서 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다루는 데서 벗어나 ‘그런 내가 모여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한 사회 속에서 불쌍하게 사는 개인을 구하는 역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헬조선’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라고, 사춘기를 거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질적으로 변화해야 불행한 사회와 개인을 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심리학이란 원래 그래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20211129_fa3dade3a49305f27f64203452ac954c.png 허태균 교수의 <어쩌다 어른> 강의 모습 (유튜브 '사피엔스 스튜디오' 캡처)

이십 대의 자식을 둘 두고 있다. 딸은 대학시절 내내 스펙 채우기를 다한 열정과 ‘노오력’ 끝에 입사를 앞두고 있다. 아들은 대학을 가지 않은 채 알바를 하다 군대를 갔고, 내년 봄이면 제대를 한다. 딸은 직장 근처에 방을 얻어 집을 나갈 예정이고, 아들은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독립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본격적인 사회인의 출발점에 서 있다.


지난 이십 년 넘게 사회 순응적으로 살아온 엄마가 보여준 것들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고 정의는 더더욱 아니라고, 엄마 같은 사람들이 만든 사회의 틈을 모색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한들, 그들이 맞닥뜨릴 한국 사회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아이들과 얘기할 때 잊지 말기로 다짐한 것이 생겼다. 심정 중심주의적인 한국인이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저자가 일러준 것.


힘들고 고생스럽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만큼 후일에 보상을 받을 거라고 믿지 말아라. 즉 인고의 착각에 빠지지 말자. 인고의 시간을 수십 년 감수했지만 내가 받아 든 소감은 '이건 아닌데'였다. 인생의 수많은 일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운이라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인정하자. 이럴 줄 몰랐다는 일들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잔인한 말을 절대 하지 말자.


독후 소감을 딸에게 전달할 자신이 없기에 책을 건넸다. 선택의 순간들마다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일독을 권했다. 몇 번 들여다봤지만 책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딸은 독한 한국사회에서 신입으로 살아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이삼십 년 후 딸도 그 시점의 한국사회를 만드는 데 스스로도 일조했으며, 그 사회를 살아내느라 흔들리고 초라해지는 순간이 많았다는 걸 깨닫게 될 것 같다.


이수정 - 크크.JPG 다시뉴스 필진 크크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중년이라 방방곡곡]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