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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시 뉴스

[공동체라는 이야기] #2

누구나 누군가가 필요하다

by 다시

흰둥이가 남의 집 담벼락에 똥을 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강아지똥은 여러 인물을 만난다. 개똥이 별 가치가 없으므로, 이어지는 만남에서 번번이 심한 무시를 당하고 모욕을 받는다. “아이고 더러워.”, “쓸모가 없어.” 등의 말을 면전에서 들은 강아지똥은 울며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삶의 전환점이 찾아오는데, 바로 민들레와의 만남이다. 민들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처음으로 강아지똥에게 “난 네가 필요해.”라고 말해준다. 거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을 들은 강아지똥은 기뻐한다.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민들레를 꼭 껴안고 빗물에 자신의 몸을 녹여 민들레꽃을 피우는 데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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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권정생 선생님이 쓴 그림책 <강아지똥>의 줄거리다. 본래는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생명력 혹은 자기희생과 생명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게는 ‘자존감’을 다루는 이야기로 읽혔다. 강아지똥에게 감정 이입이 된 것이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면 마음이 까부라지는데, 이 이야기는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근본적으로 붙잡아 맬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문장이 ‘누구나 누군가가 필요하다’이다. 누구나 강아지똥처럼 바닥을 칠 때가 있고, 그래서 저마다 다시 일으킬 자기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나에게는 타인이 있다. 나중에 이 주제를 ‘분인(分人)’이라는 개념을 통해 더 자세히 다룰 생각인데, 지금은 타인 역시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도 충분하다. '누구나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의 반대편에는 '세상은 어차피 혼자다', '내 맘 같은 사람 없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직업상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안타깝지만 이들이 많이 쓰는 말, 더 신뢰하는 말은 타인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말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닫는 말들이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마음의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순진한 기대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나약해지기도 하고, 타인의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소음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 말마따나 타인은 지옥이기도 하다.


하지만 타인이 가진 가능성마저 버려야 할까. '누구나 누군가가 필요하다'라는 말에는 가능성이 있다. 강아지똥이 민들레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면 타인은 가능성일 수 있다.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목적이 아니라 남의 요구가 되는 것이다. 행복이란 사실상 자신이 남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을 갖는 것"(「사람은 혼자가 아니다」)이라고 말했다. 헤셸의 문장과 「강아지똥」은 서로를 증명한다. 인간은 자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바닥을 칠 때 애써 '타인'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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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가능성으로 인식한다고 모든 관계가 긍정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닫는 것은 실낱같은 희망마저 거부하는 것과 같다. 어떤 면에서 마음의 문은 하나라서 입구를 닫으면 출구도 함께 닫힌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최근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거의 유일하게 인간만이 흰자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딴 데를 쳐다보면 금방 들키고 만다. “어딜 보는 거야?!” 어째서 인간의 동공이 다른 동물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에게 왜 관계가 중요한지 더듬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조건이며 은유이다.


우울한 통계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 사회를 서술하는 여러 시도 중에 ‘각자도생’이라는 단어가 있다.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인데, 지나친 말은 아닐까? OECD에서 해마다 ‘더 나은 삶의 지수’(OECD Better Life Index)라는 자료를 공개한다. 이를테면 OECD 회원국의 행복 수준을 상대 평가하는 조사다. 처음 본 것이 2015년인데, 그 이후로 한국은 ‘커뮤니티' 분야에서 해마다 꼴찌다. 질문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나는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다.”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예’를 하지 못한 것이다. 각자도생이 지나친 말이 아니고, 오히려 숫자로 확인된 셈이다. 1인 가구 비율, 공동 주택 비중, 편의점 수 등 최근 가파르게 늘어가는 숫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한국 사회 공동체성 부재의 방증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봐도 손 내밀어줄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다.

20211202_25db67c5657914454081c6a18e93d6dd.png OECD '더 나은 삶의 지수' 한국 (사진 https://www.oecdbetterlifeindex.org)

앞서 공동체 이야기를 하자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공동체에 속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특별한 공동체 경험이 없더라도 우리는 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저녁마다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골목에 둘러앉아 수다도 떨고 함께 저녁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사람에게 공동체는 어디 멀리 있는 특별한 게 아니다. 또 동네에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많고, 집안 대소사를 이웃과 치르는 것을 보았다면 공동체를 경험한 것이다. 더불어 사는 모든 삶의 방식이 공동체 경험과 닿아있다. 그때 그 시절이 좋고, 무턱대고 공동체가 좋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절망이면서 희망인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장단점도 있어야 얘기가 되는 것이지,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무엇보다 공동체가 있던 때에는 남에게 무언가 부탁하는 것이 지금처럼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이 자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존재라면, 적어도 어려울 때 손 내밀 한두 사람 정도는 떠올릴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정훈.PNG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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