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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쓰는 애도일기] #3

by 다시

가필드는 아빠와 함께 18년을 산 고양이의 이름이다. 언니는 고양이를 매우 좋아해 굶주린 유기묘들을 집으로 곧잘 데려와 키우고는 했는데,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가필드는 그중 한 어미 고양이로부터 태어났다. 꼬물꼬물 갓 태어난 네 마리의 고양이 중에서 가필드는 유독 눈에 띄게 곱고 순한 고양이였고, 내가 "얘는 분양 보내지 말고 우리가 키우자."라고 했을 때 언니는 순순히 그 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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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필드는 언니와 내가 참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느 크리스마스 날 남문 시장 한 복판 리어카에서 아빠가 나에게 사주었던 선물이 가필드 인형이었다. 언니와 나는 그 인형을 참 좋아했다. 아빠가 그 노란 비닐 인형에 ‘야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 우리는 그 이름이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인형의 똥꼬를 매일 번갈아가며 찔러대고 낄낄거리길 좋아했던 탓에 훗날 그 인형은 엉덩이 가운데가 푹 들어가 우스운 모양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큰 이견없이 키우기로 한 고양이의 이름을 ‘가필드’로 정했다. 누런 빛깔의 무늬가 가필드와 닮아서였다. 훗날 나이를 먹어갈수록 푹 퍼지는 살집이나 누워있는 건방진 자세가 만화 캐릭터 가필드와 비슷해져 ‘우리 이름 참 잘 지었다’며 웃기도 했다. 언니는 가필드를 부를 때 '필드야'하고 뒤의 두 글자만 뚝 떼어 불렀다.


가필드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큰 수술을 했다. 요로감염에 심하게 걸려 2차 병원에서 오줌이 나오는 길을 엉덩이로 연결하는 수술이었다. 오줌을 싸는 자세만 엉거주춤 이상할 뿐 다행히 그 이후로 크게 아픈 곳 없이 잘 지내왔다. 고양이의 수명이 보통 열다섯 안팎인지라, 가필드가 열다섯 살이 된 이후로는 언제든지 아빠로부터 '가필드 오늘 죽었다'는 건조한 통보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아빠가 그 길을 먼저 갔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언니에게 전했을 때, 한참 울고 난 뒤 언니는 나에게 가필드의 안부를 물었다. 내가 상을 치르고 발인을 하려면 아빠 집이 꼼짝없이 2박 3일 비게 되는데, 가필드 밥을 어째야 하는지 묻는 말이었다. 몇 년 전 뉴질랜드 여행을 갈 때 집에 사두었던 자동사료 기계가 잘 돌아가고 있다면 필드가 밥을 굶지는 않을 거라고. 아니면 중간에 남편에게 그 집에 들러보라고 하겠다고 언니를 안심시켰다.


아빠의 발인을 마친 후 언니와 나는 부지런히 아빠 집을 드나들며 짐들을 정리했다. 상해버린 냉장고 속 음식물을 처리하고, 가전제품을 수거업체에 맡겨 버리고, 옷과 가방 신발도 수거하는 아저씨를 불러 제3세계로 보냈다. 가구는 스티커를 붙여 하나씩 빼냈다. 우리 가족이 1989년부터 살았던 집. 2002년부터는 아빠와 언니만, 그리고 2011년부터는 아빠 혼자 가필드와 살았던 집. 그 오랜 흔적을 없애고 빼내려니 해도 해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언니와 아빠 이야기를 하며 집을 정리하는 동안 가필드는 우리 곁에 와 몸을 부비적 거리며 야옹야옹 울었다.


언니는 '우리 가필드는 이제 어쩌지' 혼잣말을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호주로 데려가는 방법을 알아보느라 분주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언니는 이틀에 한 번씩 가필드를 찾아갔다. 어느 날 언니가 벌게진 눈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가필드 스스로 죽으려나 봐. 밥을 아예 안 먹어. 지난주 내내 사료가 하나도 안 줄었어. 기운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고, 움직이지도 못해.”


아빠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다는 걸 가필드는 알았겠지. 여행으로 아빠가 집을 길게 비웠던 때와는 달리 우리가 끊임없이 집 안에 채워져 있던 내용물들을 빼내고 공기를 바꾸었으니까. 고양이는 천천히 말해주면 다 알아듣는다는 수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아빠는 돌아가셨어. 필드야, 이제 우리는 어쩌면 좋니.’라고 말한 언니의 주억거림을 가필드는 이해했던 걸까.


언니가 호주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를 타기 이틀 전, 마지막으로 다 같이 아빠의 집에 들렀을 때. 문을 열자마자 “필드야!”하고 불렀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었을 때. “왜 답이 없지? 가필드 죽었나 봐.” 하며 언니가 안 방으로 뛰어들어갔을 때. 18년 동안 아빠 곁을 살갑게 잘 지켜 준 네 마지막 뒷모습을 봤을 때. 평생 순하게 살았던 네 뒷모습이 왜 그리도 작게 느껴졌는지. 얼마나 너에게 고맙고 참 많이 미안했는지.


아빠가 가고, 꼭 한 달 뒤. 가필드를 화장해 작은 유골함에 넣고 돌아오는 내내 거리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이 내렸다. 금색 보자기로 싸인 손바닥만 한 상자를 안고 우리는 질질 콧물을 흘렸다.


”가필드는 참 요물이지.”

“언니, 요물이 아니라 영물이겠지.”

”요물이나 영물이나. 그게 그거 아냐?”

“요물은 요사스러운 거고. 영물은 영험한 거잖아.”

“아. 그렇구나.”


가필드가 없었다면 우리 아빠는 10년 동안 참 쓸쓸했겠지. 아빠는 가필드의 동영상도 참 자주 찍고는 했었는데. 늦은 밤 종이봉투에 치킨을 사서 들어가면 가필드가 ‘야옹’하고 그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먹고는 한다고 했었어. 우리 집 두 아들도 아빠네 집이 허름하고 추운데도 고양이가 있다는 이유로 그 집에 가는 걸 참 좋아했었지. 아빠가 가는 길이 가필드 덕분에 외롭지 않겠지. 필드야. 아빠 평생 친구 해줘서 고마워. 둘이 꼭 만나서 같이 갔으면 좋겠어.


작성자: 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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