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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31. 2022

[꼭 뭐가 되어야 할까?] #10

나도 해방일지

“할 일도 없고 심심한데, 강릉 가서 커피나 마시고 올까요?”

“갑자기? 지금? 그럴까?”


월요일 오후, 느닷없는 강릉행은 이렇게 무심한 모녀의 대화로 시작되었다. 팬데믹 이후 칩거의 나날을 보내온 여든의 아버지도 대답 대신 슬그머니 외출 채비를 하셨다.


그렇게 우리 3인 가족은 ‘커피 한 잔’ 하러 강릉으로 향했다. 오후 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길이 뻥뻥 뚫려도 2시간 반. 왕복 5시간은 족히 넘을 장거리 운전이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래도 ‘뭐 까짓, 경기도민이 러시아워에 서울 다녀오는 셈 치자’ 싶었다.

 

오로지 커피 한 잔을 위한 여행의 서막


목적은 오로지 ‘강릉 커피 한 잔’. 되도록 당일로 돌아올 심산이었지만 혹시 몰라 노트북은 챙겼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엄마는 그새 혹시 몰라 여행용 칫솔 3세트를 챙기셨단다.


과연 커피 덕후다운 일상이려니 한다면, 오해다. 최근 1년 반 사이 커피 덕질을 시작했다면서도 커피 때문에 가본 곳이라곤 서울과 거주지인 경기도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나마도 그 근처 간 김에 들르는 정도지 오로지 커피를 위해 5시간씩 운전을 하는 열정은 애초에 타고나질 못했다. 사주에 있다는 어마어마한 역마살도 현세의 일상에서는 무용지물인 집순이, 그리고 그 집순이의 DNA를 제대로 물려주신 내 부모다.


목적지는 커피의 성지로 널리 알려진 안목항보다 살짝 덜 유명하고, 그래서 조금 더 아늑하다는 사천진 해변.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예상 소요 시간은 2시간 30분이었다. 하지만 연로하신 아버지 덕에 휴게소마다 들르는 바람에 1시간이 추가되었다. 엄마는 살짝 짜증을 내셨지만 나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고속도로에서 나와 사천진 해변 진입구를 못 찾아 빙빙 도는 늙은 딸을 아버지가 닦달하지 않으시듯 나도 휴게소마다 화장실을 들러야 하는 아버지를 닦달하지 않는 것이 맞다. 그래도 빙빙 돈 덕에 작정하고 찾아가려 했더라면 절대 못 찾았을 1세대 바리스타의 로스터리 카페를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파나마 게이샤, 이 한 잔을 마시러! (사진: 정연숙)


커피는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맛있고 향기로웠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파나마 게이샤를 납득할 만한 값에 마실 수 있어 먼 길 떠나온 보람이 있구나도 싶었다. 물론 ‘개이득’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걸 그렇게 산술적으로만 계산하며 살아가랴! 그렇거나 말거나 오로지 ‘강릉 커피 한 잔’이 목적인 여행이었으니 목적은 이미 초과 달성했다며 우리는 마치 청춘인 양 속없이 웃었다.


3인 가족이 화목해지는 법


이 여행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엄마에게 넌지시 운을 뗀 것처럼 그렇게까지 할 일이 없고 한가롭지는 않았던 한 주의 시작, 월요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른 점심을 대충 때우고 오후엔 밀린 원고를 써야겠다 생각하던 찰나였다. 거실 TV에서는 벌써 몇 번째 재방송인지 모를 <런닝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런닝맨> 류의 정신 사나운 예능 프로그램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을 부모님인데, 하필 일본과 대만으로 여행을 떠나 미식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에 시선이 꽂히셨던 모양이다. 한참을 넋을 놓고 TV에 집중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에, 불현듯 전날 본 주말 드라마가 떠올랐다.


수원 근처 경기도 남부의 작은 시에 살며 서울로 매일 출퇴근하는 삼 남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그렇게 인기 절찬이라기에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다. 막내 미정과 일꾼(?) 구 씨가 거의 주인공 격인 듯한데 나는 삼 남매 중 장남 창희에게 늘 묘하게 마음이 갔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우린 더 화목해질 거예요. 그런데 4인 가족이 화목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차가 있어야 해요.


몹시 가부장적이고 지나치게 과묵한 아버지에게 장남 창희는 언제나 씨알도 먹히지 않던 차 이야기를 그렇게 또 은근슬쩍 꺼냈다. 이번에도 물컵이나 숟가락이 날아오겠거니 했는데, 다음 장면은 의외로 4인 가족이 함께 승용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4인 가족은 바닷가에 도착했고, 여전히 과묵한 아버지를 따라 일렬종대로 역시 과묵하게 해변을 걷는 삼 남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애잔하면서도 귀엽기까지 했다. 얼마 전까지 5인 가족이었던 그들. 하지만 압력솥에 밥 안쳐놓고 방에서 잠시 쉰다던 어머니가 주무시듯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느닷없이 4인 가족이 되어버렸다. 그 어처구니없는 상실감을 이렇게 인위적인 화목으로라도 메꿔보려는 장남의 안간힘이 안쓰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 듬직하기도 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졍연숙, "나도 해방일지",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2022. (사진: 정연숙)

그래, 우린 아직 상실 없는 완전체로서의 3인 가족인데, 하물며 화목의 선제 조건인 차도 이미 있는데, 더 화목해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깃발 꽂지 않아도, 뭐가 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다정해질 수 있다면


연로하신 분들에게는 자칫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바이러스를 피해 칩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 슬슬 한계에 도달하신 게 분명한 부모님. 당신들 생애에 가장 젊은 날을 위해 오늘은 우리 3인 가족도 좀 더 화목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적중했다. 그 짧은 여행길에 그리고 그 후로도 한동안 우린 충분히 화목했으니 말이다.


혹시 모를 1박의 가능성을 뒤로하고, 뉘엿뉘엿 저무는 해와 함께 우린 다시 집으로 향했다. 올 때는 반대편에 있던 휴게소까지 도장 깨기 하듯 다 들렀다 오느라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 일일생활권은 이론이 아닌 실제임을 체험한 하루는 그렇게 무탈하게 끝이 났다. 그러므로 더욱 화목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장거리 운전을 한 날은 오히려 쉽게 잠이 들지 못한다. 커피 한 잔을 위해, 아니 화목해지기 위해 5시간 이상을 운전한 그날도 그랬다. 뒤척이다 <나의 해방일지> 속 창희의 또 다른 독백 대사가 떠올랐다.


솔직히 저는 깃발 꽂고 싶은 데가 없어요. 돈, 여자, 명예 어디에도… 근데 꼭 깃발을 꽂아야 되나? 안 꽂고 그냥 살면 안 되나? 없는 욕망 억지로 만들어서 굴려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호라! 그랬구나! 내가 유독 창희에게 마음이 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꼭 깃발을 꽂아야 되냐던 너의 마음이 꼭 뭐가 되어야 하냐던 내 마음을 닮았구나! 암! 그렇지. 안 꽂고 그냥 살아도 되지, 꼭 뭐가 되지 않더라도 그저 정성껏 살아가면 되는 거지!


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난 그냥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고… 태어나지도 않은 형이 그리워요.


그 밤 나는 남자라, 장남이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기대했던 깃발을 꽂지 않아도 혼자서도 충분히 다정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그럭저럭 괜찮다고 느끼는 창희의 해방된 마음을 깊이 ‘추앙’했다. 그리고 어쩌면(사실은 결국) 영영 아무것도 되지 않을지 모를 나의 중년을 더욱 ‘환대’하기로 마음먹었다.


- 본 시리즈는 연재 완료되었습니다 - 


다시뉴스 필진 정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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