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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26. 2022

[공동체라는 이야기] #7

존중의 서사

베짱이를 떠올리다


레오 리오니가 지은 '프레드릭'이라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미와 베짱이’ 패러디에 가까우니 줄거리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들쥐들이 분주하다. 옥수수와 나무 열매와 밀과 짚을 모아 겨울을 준비하느라 모든 들쥐들이 밤낮없이 일을 하는데, 오직 프레드릭만 일을 하지 않는다. 다른 들쥐들이 왜 일을 안 하냐고 프레드릭에게 물으면, 프레드릭은 수수께끼 같은 답변만 한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기나긴 겨울엔 얘깃거리가 동이 나잖아.


먹이가 넉넉한 때는 마음도 넉넉하고 모두가 행복했다. 겨울이 오고, 나무 열매며 곡식 낟알이 떨어지고, 짚도 옥수수도 보이지 않게 되자 겨울바람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그때 들쥐들이 프레드릭을 떠올린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찾아간다. 프레드릭은 커다란 돌 위에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눈을 감아 봐, 내가 너희들에게 햇살을 보내 줄게. 찬란한 금빛 햇살이 느껴지지 않니…


햇살 이야기에 들쥐들의 몸이 점점 따뜻해진다. 프레드릭이 파란 덩굴 꽃과, 노란 밀짚 속의 붉은 양귀비꽃, 초록빛 딸기 덤불 얘기를 들려주고, 사계절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들쥐 이야기를 들려주자 들쥐들은 박수를 치며 프레드릭이 시인이라고 감탄한다. 


자기라는 감옥


그동안 나는 네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투박하지만 이 정도가 될 것이다.


(1) 개인도 없고, 공동체도 없는 상황

(2) 개인은 있지만, 공동체가 없는 상황

(3) 개인이 없고, 공동체는 있는 상황

(4) 개인도 있고, 공동체도 있는 상황


(1)은 가장 부정적인 상황이고, (4)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다. 양 극단을 제외하면 결국 우리가 이야기해봐야 할 상황은 (2)와 (3)의 경우이다.



(2)에서처럼 개인은 있지만 공동체가 없는 상황은, 간단히 말하면, 이기적인 개인이 많은 경우일 것이다. 이런 상황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아가 삶의 목표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세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자기보다 큰 주제를 만나지 못한 사람, 자기보다 더 큰 이야기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기라는 감옥에 갇히고 만다. 자아가 삶의 목표가 된 삶을 떠올리면 나는 고흐의 '감옥 마당'이 생각난다. 


빈센트 반 고흐, ‘감옥 마당’ (‘운동하는 죄수들’ 혹은 ‘죄수들의 원형 행렬’로도 알려짐), 유화, 1890


물론 한 길 사람 속을 모르기 쉽고, 한 사람은 우주보다 더 귀하다고 하지만, 아무리 한 개인의 세상이 오묘하고 충만해도 자신이라는 단 하나의 세계만으로 충분한 사람은 없다. 자아가 삶의 목표가 된 삶은 자기라는 감옥에 갇힌 것과 다르지 않다. 자아의 바깥에 있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결국 자기라는 좁은 세상에서, 그 어떤 비범한 인간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권태'라는 상대를 만나고 만다. 내 경험으로만 말하면, 이 세상을 무너뜨리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권태'다. 


사람이 없으면


반면 (3)은 개인이 없고 공동체만 있는 상황이다. 이기적인 공동체에는 사람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있으나 사람대접받는 사람이 없다. 공동체의 사전적 정의는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적 단위'이다. 그러나 공통의 가치를 위해 하나가 된 모든 사회적 단위가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컨베이어 벨트'를 생각해보자. 목적을 위해 일사불란하고, 또 매우 생산적이기까지 하지만 사람대접받는 사람이 없다면, 그곳은 공동체 일 수 없다.


사람이 없는 공동체는 지난 글에서 강조했던 ‘주제 중심’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주제 중심 공동체에서는 주제와 사람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주제와 개인이 관계 맺고, 주제와 관계 맺은 개인들 간의 관계 맺기로 형성된 연결망 그 자체가 공동체의 본질이기 때문에, 주제 중심 공동체는 공동체를 위해 사람을 희생하지 않는다. 주제 중심 공동체에서 경계해야 할 단 한 가지는 주제가 개인을 압도하는 상황일 뿐이다. 



존중의 서사


‘개미와 베짱이’를 패러디 한 작품으로 보면 '프레드릭'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예술의 발견이나  생산성에 대한 성찰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원작인 ‘개미와 베짱이'에서는 여름내 일하지 않고 노래한 베짱이가 결국 겨울에 굶어 죽는다. 아무도 그가 무엇을 노래했는지, 그가 왜 노래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에서는 게으름의 부정적인 면만이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프레드릭'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프레드릭을 향한 존중의 서사. 그를 기억하고, 그의 양식을 궁금해하는 동료들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은 공동체를 통해 세계를 확장하고, 공동체는 사람을 통해 미래를 획득한다. 존중의 서사에 우리 공동체의 미래가 있다.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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