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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22. 2022

[중년이라 방방곡곡] #4

적과의 동침

사전에 라파스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우리는 이 도시에 이틀 이상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짐가방이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둘러본 셈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드디어 공항 직원이 약속을 지켜 짐가방이 도착해 있었다. 남편은 짐 가방을 드륵드륵 방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장엄한 목소리로 “라파스에서의 첫 샤워를 하겠노라” 선언했다. 나는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마당 테이블에 나와 있었다. 이제 우유니로 가는 국내선 항공편을 마음 놓고 티켓팅할 수 있다.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 남편이 젖은 머리를 털며 나와 우유니에서 묵을 숙소를 같이 찾아주겠다며 호기롭게 자기 노트북을 찾았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숙소를 고르는데 한 청년이 웃통을 벗고 타올로 몸을 감싼 채 괜히 혼자 마당을 서성이는 게 보였다.  


쟨 왜 저러고 다닌데?


흉보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청년은 급히 몸을 피해 안쪽 복도로 사라졌다. 가난한 배낭족들이 침대 한 칸만 배정받는 다인실이 있는 쪽이다. 어수룩한 그의 뒤태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누가 발가벗고 돌아다니든 대낮에 스트립쇼를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 우리의 라파스에서의 고생도 끝이다. 볼리비아에 온 진짜 목적인 우유니 여행이 내일 시작된다.  


나는 숙소 사무실 프린터기에서 항공권을 인쇄한 뒤 방으로 향했다. 남편은 늘 그렇듯 또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남편을 째려보자 마당 테이블에서 행복하게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각자의 가방을 찾아 항공권을 챙겨두었다. 헤벌레 입을 벌리고 있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남편의 여권을 마지막으로 꺼내 항공권을 갈피에 꽂아두었다.  


장기 해외여행을 할 정도로 죽이 잘 맞는 부부여도 일상의 사소한 디테일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나 같은 경우는 뭐든 펼쳐놓는 것을 싫어해서 가방이나 트렁크에서 물건을 꺼내면 꼭 입구를 다시 닫아놓는다. 테이블에 물건을 늘어놓는 일이 없고, 다 쓰면 서랍이나 장에 차곡차곡 도로 집어넣는 스타일이다. 반면에 남편은 물건을 보이는 데 주르륵 늘어놓는 유형이다. 가방이나 트렁크 문을 항상 활짝 열어놓고 물건들을 빼 쓴 뒤 열린 가방 내용물 더미 위에 다시 툭 던져놓는 식이다. 그에게는 보이고, 툭툭 다 거기 있는 게 중요하다. 이런 차이를 두고 서로 왈가왈부하는 건 치약을 끝부터 짜라, 중간을 짜는 게 뭐 어떻다고 그러냐라고 싸우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우리는 고유한 생활양식에 대해서는 잔소리하지 않고 각자 자기 방식대로 편히 살게 둔다.  


호텔 예약까지 마치고 홀가분하게 저녁을 먹고 돌아온 우리는 미리 가방을 싸놓기로 했다. 우유니는 라파스보다 조금 더 높고 조금 더 춥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급히 꺼내 입을 옷을 비행기에 들고 타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이 물었다.  


당신 혹시 내 돈 가방 챙겼어?
아니?


갑자기 남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더니 허둥지둥 이 가방 저 가방을 쑤시며 뒤지기 시작했다. 허리쌕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긴 항공권을 두려고 안을 봤을 때 헤벌린 가방 맨 앞에 늘 있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우유니 여행을 위해 미국을 거쳐 올 때 여행자금을 미국 달러로 뽑아 분실 위험을 줄이려고 전체를 반으로 나눠 각각 챙기고 있었다. 중남미에서는 카드 사용 수수료를 업체가 물지 않고 고객이 내서 잘 쓰게 되지도 않지만, 신용카드 단말기를 갖고 있지 않은 가게나 식당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아서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게 편하다. 그렇게 들고 다니던 내 여행경비는 볼리비아에 오기 전 멕시코에서 다 썼다. 이제 의지할 것은 남편이 갖고 있는 나머지 반. 멕시코에서 현금인출이 가능한 체크카드까지 분실한 터라 달랑 신용카드 한 장 남아 있는 상황. 그런데 그 돈이 없다!


큰 사건을 맞닥뜨릴 때면 부부의 캐릭터는 차이를 드러낸다. 나는 이미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것이므로 그것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이제부터 어떻게 여행경비를 마련할지 대책을 세우는 데 집중한다. 반면 남편은 상황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서 자신이 납득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계속 복기하며 중얼중얼 혼잣말을 한다. 나는 그 부산함을 뒤로 하고 남은 기간에 들 여비를 빠르게 암산하며 입을 앙 다물고 신용카드로 어떻게 돈을 나눠 뽑아 쓸지 궁리한다. 신용카드 현금 인출액의 일일 한도액과 현재 통장 잔액 등을 대조하며 머리에 불이 난다.  

남편이 문득 자기가 샤워를 하고 있는 중에 내가 방에 들어온 적이 있는지 묻는다.


아니? 근데 마당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뒤에서 방문 닫히는 소리를 듣긴 들었어. 그때 당신이 샤워를 하느라고 문을 잠근 건 줄 알았지.


남편은 그때 누가 방 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게 나라고 생각해서 샤워 중에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남편의 길고 긴 추론이 끝났다. 샤워 중에 겁 없는 누군가가 들어와 남편의 가방을 뒤졌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짚을 수 있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웃통을 벗고 샤워 타월을 걸치고 어색하게 서성이다가 우리랑 눈이 마주친 그 추레한 백인 배낭족. 어떻게 그렇게 대담한 짓을 했을까? 한 사람은 욕실에 있고 한 사람은 바로 근처에서 뒤만 돌아보면 그만인 상태로 떡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 정도로 과감하려면 평소 우리를 지켜보아 남편이 문을 잘 안 잠그는 버릇이 있고 나는 노트북을 하면 집중해서 딴 데 별로 신경을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곁에 도둑을 두고 한 숙소에서 사이좋게 잠을 잤다니, 적과의 동침이 따로 없다.  

젊었을 때 배낭 여행을 해본 적 없는 남편은 출장 말고는 해외 출타 경험이 없다. 그래서 현금을 가방이 아니라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필요에 대해 알지 못한다. 조언을 해주면 항상 ‘괜찮아’라고 대꾸하던 그였다. 나는 일찍이 대학 초부터 혼자 배낭 여행을 많이 다녀서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나만의 특별한 방법을 갖고 있다. 이태리타월 2개에 고액 지폐를 나눠 넣고 바지 안 쪽에 옷핀으로 봉해놓는 것이다. 오랜 비행으로 돈이 구겨지는 단점은 있으나 당장 쓸 소액의 돈만 지갑에 넣고 다니면 되고, 돈이 필요하면 어디서든 화장실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되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고 누구에게도 티가 안 난다. 하지만 남편은 평소에도 아무데나 돈을 쑤셔 넣고 다녀서 세탁할 때 보면 이 호주머니 저 호주머니에서 돈이 막 떨어지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가 방문도 안 잠그고, 얼핏 봐도 돈가방인 줄 한눈에 다 아는 허리쌕에 돈 전부를 집어넣고, 지퍼를 헤벌레 열어 놓은 배낭 속에, 집어 가져가기 딱 좋게 넣어 두고 혼자 샤워를 하러 들어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싸우지 않았다. 비난이 오가지도 않았고, 서로 열 받아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일도 없었다.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일을 해결하느라 조용히 바쁘기만 했다. 나는 한국은행에서 이 쪽으로 돈을 보낼 방법을 찾고, 어디를 가야 송금받은 돈을 전달받을 수 있나 지도를 펴놓고 이것저것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내 앞에 달러 뭉치를 내놓았다. 깜짝 놀라 물으니, 미국 여행 중 서울에 혼자 급히 갔다 와야 했을 때 돈을 더 챙겨 온 거라고 했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여태 이 돈에 대해 내게 한 마디 언질이 없었나?
멕시코에서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며 돈이 부족할 것을 걱정할 때 그런 나를 뻔히 보면서도 침묵을 일관했단 말인가?
남자들은 왜 이런 식으로 딴 호주머니를 차려는 거지? 몰래 숨겨둔 이 돈으로 도대체 뭘 하려고 한 걸까?
아, 그래서 이 돈을 수하물 가방에 넣어놓고 있어서 보고타 공항에 짐이 묶였다니까 그쪽에서 가방을 열었냐 아니냐를 그렇게 따져 물었던 거구나?
그런데 도대체 왜 나한테 이리되었노라고 말을 못 한 거야? 내가 바가지를 긁을까 봐?


나는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보다, 돈을 숨겨두고 내내 침묵했던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남편이 사무실에 의논을 해보겠다고 나갔다. 나는 따라나서지 않고 방에 가만히 앉아 남편이 건네준 달러를 몇 번이고 세기만 했다. 빠듯하게 계산된 여행 경비를 어찌어찌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자, 갑자기 안심이 확 되면서 긴장이 풀렸다. 나는 내 빈 이태리타월에 새 돈을 넣고 바지 양편에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돈을 잔뜩 껴입고 침대에 누웠다. 문제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내 사고는 거기서 멈췄고 갑자기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중에 남편이 그러는데 그때 내가 너무 쉽게 안심하며 마음을 내려놓아서 서운했다고 한다. 남편은 돈을 잃어버린 장본인이었고 개인 돈을 공돈으로 내놓아야 했으니 그 상황이 훨씬 더 안타까웠을 것이다. 남편은 세상모르게 자는 내 옆에 누웠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하며 사무실에 가서 경찰을 부르네 마네 의논을 하느라 새벽 내내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심증만으로 그 반 벌거숭이 청년의 방에 쳐들어가 물건을 전부 뒤집어 까 보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숙소에서는 경찰을 부른들 얘기만 듣다 가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거라면서 자기네 입장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다. 결국 우리는 다음날 일찍 그냥 숙소를 나왔다. 빳빳한 새 돈을 뭉텅이로 잡고 좋아했을 반벌거숭이 녀석을 생각하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돈으로 네 남은 여행 풍족하게 잘해봐라'라고 기원해주고 말았다.  

우유니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돌조각이 두 동강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첫날 마녀 시장을 구경할 때 볼리비아 원주민들의 수호신이라기에 무사 여행을 기원하며 샀던 것이다. 골목마다 빽빽하게 차 있는 노점 상인들과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벽돌집에 사는 라파스의 이 많은 사람들을 수호하기 바쁠 이국의 신에게 타국에서 온 믿음도 부족한 내가 뭘 바란 걸까?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우리는 라파스의 잘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이곳을 괜히 기분 나쁜 도시로 영원히 낙인찍어 버렸다.    


다시뉴스 발행인 박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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