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 뉴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Jun 30. 2022

[공동체라는 이야기] #8

공동체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고레에다의 가족 이야기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한다. 과거에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환상의 빛」을 읽고 그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다가 그의 영화 세계에 ‘입덕’하게 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을 챙겨 봤고, 몇 년 전에는 그의 <원더풀 라이프>가 재개봉된다고 해서 환호했으며, 그의 책들도 몇 권 읽었다.


내가 고레에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꾸준하게 가족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걸어도 걸어도>, <태풍이 지나가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등에서 가족이란 소재를 영화로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물론 매력적인 모든 소재가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가족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인 이야기가 되는 건 드문 일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나는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 고레에다의 가족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번에 개봉된 영화 「브로커」의 소재도 역시 가족이다.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그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했다. 고레에다의 가족 이야기는 가족을 생각하게 한다.


보편적 공동체는 없다


나는 결혼해서 아들이 넷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들이 넷이라고 말하면 으레 "애국자시네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냥 웃고 말지만, 사실 그 말을 들으면 ‘저는 애국자도 아니고, 앞으로도 애국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명절에 가장 듣기 싫은 말로 사람들은 "결혼 언제 할 거야?", "애는 언제 낳니?"라는 말을 꼽는다. 가족을 강조하거나 전통적 가족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당연한 듯 던지는 이런 말이 가족이라는 개념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가족을 생각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는 이미 보편적 가치로 전제하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공동체는 어떠한가? 보편성이 위기에 처한 현대에 공동체라고 예외는 아니다. 공동체에 관한 글을 연재하면서, 계획한 바는 없지만 그래도 결론에 가서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이 계속되었다. 사실 내 깜냥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어떤 면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강조할수록, 또 전통적 공동체의 부활을 꿈꿀수록,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듯, 보편적 공동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가족과 공동체는 존재할 것이다.


관광객의 철학


그러면 나는 왜 공동체에 대해 글을 쓰는가? 다만 공동체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공동체에 관해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인데, 글을 쓰면 쓸수록 부담이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공동체에 관해 어느 정도의 틀은 제시해야 그동안 써온 글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일본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 역시 ‘가족'을 말한다.


그는 저출산 문제 같은 것을 예로 들어, 현대 사회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서로 다른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공존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보편적 정의와 공공의 선,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저출산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 사회는 개개의 여성을 얼굴이 있는 고유한 존재로 취급하는 한, 즉 인간으로 취급하는 한 결코 '아이를 낳아라!'라고 명령할 수 없다. 이는 윤리에 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여성 전체를 얼굴 없는 집단으로 분석할 때는 일정 수의 여성이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경제적 또는 기술적으로 다양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윤리에 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 도덕 판단을 (기묘하게도!)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현대의 출산을 둘러싼 윤리다. (147-8)


그는 이런 세상에서 '관광객의 시선을 도입하지 않고는 누구도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라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기서 ‘관광객’은 보편적 정의와 공공의 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혹은 정치적)인 가능성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아즈마는 '우편적 다중'과 '오 배'라는 철학적 개념을 이용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이질적인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가진 존재가 ‘관광객’인 것이다. 관광객은 평소라면 만날 수 없거나 만나지 않을 사람(사건)을 경험한다.

관광객이 바로 우편적 다중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정의다. (중략) 여기서 우편적이라는 말은 어떤 물건을 지정된 곳에 잘 배달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배', 즉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함축한 상태를 뜻한다, 관광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편적'이다. (163-4)


아즈마의 가족 이야기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복잡한 설명이 있지만 서로를 위해 생략하기로 하고, 나에게 의미 있는,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보편적 가치가 빗나간 곳에서 우연하고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나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공동체 비슷한 것이 만들어진다. 이때 만들어진 공동체는 이를테면 우연적 공동체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나중에 공동체가 해체되고 난 다음에 기억을 되짚어보면서 '내가 그때 공동체는 아니지만, 공동체 비슷한 것을 경험했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결국 이 착각이 실패를 무릅쓰고 다시 공동체를 시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질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진 존재와 이질적인 소통의 확대가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질적인 소통의 확대로 형성된 우연적 공동체는 다른 요소로 보완되지 않으면 곧 흩어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즈마는 그 다른 요소로 '가족적인 것'을 제안한다. 이런 맥락에서 '관광객의 철학'이 '가족의 철학'과 만난다. 아즈마는 이질적인 소통으로 생겨난 유사 공동체를 보완할 가족적인 것으로서 강제성, 우연성, 확장성을 꼽았고, 이 셋은 다시 '연민'이라는 주제로 연결된다.

필연적 가족만 가족이 아니다. 이질적 소통으로도 얼마든지 가족이 생성된다. 이 우연적 가족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의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한솥밥'을 먹는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는 것. 피가 섞이지 않아도 우리는 가족처럼 서로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반려동물이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분이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은 필연적 가족이 아닌 우연적 가족에 가깝지만, 한번 가족이 되고 나면 필연적 가족 못지않은 강제성이 생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아즈마의 가족을 설명하는 특징이 될 수 있다.


공동체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다시 정리하면, 이질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다가 우연한 기회를 통해 공동체 비슷한 것을 경험한다. 이런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하고 곧 소멸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복기하면서 '내가 경험한 게 공동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고 다음에도 이 공동체 비슷한 것을 추구한다. 그다음 번의 공동체 추구를 '가족적인 것'이 보완해줄 수 있다면, 보편적 가치가 사라진 이 시대에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공동체의 ‘느슨한’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아즈마를 통해 영감을 받은 부분이 바로 이런 지점이다. 미래의 공동체 모델을 이거다 저거다 구체적으로 제안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에 관한 이런 감각을 가지고 어느 정도의 범위와 특징을 가지는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것은 다분히 경험적이다. 돌이켜 보면, 우연한 기회와 만남을 통해 소통한 사람 중에 전통적 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잘해줄 만한 이유가 딱히 없는데도, 연민을 가지고 특정 기간에 나를 가족처럼 보살펴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힘으로 이제까지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레에다의 가족 이야기와 아즈마의 가족 논리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앞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연민을 가지고 가족이 되려는 시도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비록 실패가 눈앞에 보여도 '공동체가 되려는 시도' 하는 것이 그래도 노력해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글이 공동체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야기’니까.


다시뉴스 필진 한정훈
매거진의 이전글 [중년이라 방방곡곡] #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