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청춘들의 행운을 빕니다
성철 씨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성철 씨 이야기는 <고구마 세 개> #6~7. “성철 씨의 스스로 구제법 1, 2”에 있습니다).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던 성철 씨는 ‘저 너무 살기 힘들어요’ 하면서 사고 친 내용을 풀어놓았습니다.
“쌤이 사고 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근데 저 사고 쳤어요”
“그래서 무슨 사고인데?”
“교통사고요.”
“다친 사람은 없어?”
“사람이 다친 건 아니고요.”
“다행이네, 빨리 사고 접수하고...”
“아, 사고가 지금 난 게 아니고요, 좀 됐어요. 제가 친구 차를 빌려서 탔는데 주차하다가 서 있는 차를 박았어요. 그래서 삼백만 원에 합의를 봤어요. 그래서 돈도 다 줬는데...”
“돈은 어떻게 마련했어?”
“사채도 좀 쓰고, 집에서는 몰라야 해서요. 그런데 백오십만 원을 더 내놓으래요. 수리 안 되고, 폐차해야 한다면서요.”
삼백만 원을 덜컥 주면서 합의서도 쓰지 않은 모양입니다.
“돈만 주면 다 끝나는 건 줄 알았는데, 다시 돈 달라고 하니까 미치겠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사건 접수하고 보험 처리하자고 하면 안 되는지 묻자 성철 씨는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이유는 무면허랍니다. 그리고 성철 씨는 말합니다.
“저 다시 거기 들어가고 싶어요. 나와서 사는 거 너무 힘들어요. 차라리 그 안이 더 편해요.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잖아요. 거긴...”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는 말이 혀끝에 머물다가 사라졌습니다. 이 년 전, 연말 특사로 나와서 건설 현장 일용직과 물류창고 ‘까대기(물건을 운반하고 배송 지역별로 분류하는 작업)’’를 번갈아 하면서 삶을 유지해 온 성철 씨가 이 년 만에 다시 만난 위기의 순간입니다.
병원 보호자실 소파와 공원 벤치를 집 삼아 전전하던 민재(민재 이야기는 <고구마 세 개> #4. “‘밖’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있습니다)가 교도소에 들어간 것은 4년 전 일입니다. 그리고 민재가 다시 사회로 나온 것은 1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장4 단3(소년수들에게만 적용하는 부정기 형량으로 모범수가 되면 4년 형기를 3년으로 줄여주는 것입니다)’을 선고받고 변호사도 못 쓰고, 합의도 못 하고, 항소는 생각도 못 했던 민재는 그 안에서 ‘성실한 생활’을 한 덕에 3년 만에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들어갈 때부터 소아 당뇨 상태였던 민재는 담장 안에서 규칙적인 식사와 생활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아픈 재소자들에게 약을 나누어주고 입원실 청소도 하는 병동 사역으로 죗값을 치르면서 민재는 ‘지낼 만하다’, ‘살면서 처음으로 부여받은 규칙적인 일이 왠지 뿌듯하다’, ‘나가면 꼭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보여주었습니다. 함께 길 위에서 휘돌던 친구들이 보고 싶었는지 민재는 친구들의 사진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산수유 꽃봉오리가 금빛으로 오르던 어느 봄날, 검정고시 책을 넣어 달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민재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이 학년 일 학기까지 적을 둔 이력이 있습니다. 민재는 일 년 만에 검정고시를 패스했지만 점수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재소자에게 검정고시 재시험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기회균등 차원이나 징벌적 속성 때문에 그런 규칙이 생겼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검정고시를 자기 성장의 계기로 만들어 보려던 민재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처분이었습니다.
스스로 그만둔 학교를 다 마친 것만큼의 시간을 ‘그 안’에서 보낸 뒤 민재는 비로소 가족과 합류하고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첫 일자리는 콘크리트 타설 일이었습니다. 레미콘이 배합한 콘크리트를 펌프카가 받아 타설 할 곳으로 보내면 작업 층에 콘크리트가 고루 퍼지도록 배관 위치나 평탄을 잡아주는 것이 민재의 일입니다. 긴 장화를 싣고 콘크리트 범벅을 헤집고 다녀야 하기에 체력이 꽤 소모되는 일인데, 민재에게는 좀 무리겠다 싶어서 걱정되었습니다.
“소개해준 형이 저 정도면 할 수 있는 일이라니까 일단은 믿고 가 보려고요. 일당도 다른 일보다 좋아요. 그리고 또... 저 같은 이력이 어디 내밀 데도 없고요.”
그렇게 현장으로 떠난 민재는 여섯 달 만에 다시 연락해 왔습니다. 몸이 많이 축나서 타설 일은 그만두고 물류 일을 다시 알아보는 중이라고 합니다. 아직 새 일을 잡지 못해서 생활비가 바닥난 민재는 어렵게 십만 원을 빌려달라는 부탁도 했습니다.
물류 일은 기댈 곳 없이 가난한 청춘들의 ‘취업 블랙홀’입니다. 말 그대로 몸과 시간을 갈아 넣어서 그 달 그 달 생활비를 메꾸어야 하는 딱한 청춘들에게는 일면 고마운 ‘월급 기계’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컨베이어 벨트와 출퇴근 버스의 돌고 도는 흐름에 온전히 일상을 맡기고 청춘이 저물도록 일해야만 생계유지가 가능한 현장일 뿐입니다.
이미 물류 쪽에서 자리 잡은 대성이나, 유미, 한철이의 소식을 잘 들을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작업 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민재도 결국 물류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이 겨울이 다 가도록 연락이 없는 상태입니다.
제이는 지난 연말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이 이야기는 <고구마 세 개> #10. “교도소에 다녀왔습니다”에 있습니다). 십사 개월 만의 귀환입니다. 그동안 재판정에서 두 번, 구치소에서 한 번 만났는데, 제이는 그 순간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제이는 밝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옥바라지를 해준 남자친구와 함께여서 더 행복한 듯 보였습니다.
제이 남친은 ‘요즘 이런 남자가 어디 있어?’ 하고 감탄하는 복지사에게 ‘그냥 제이가 좋아서 한 일이라서 고생스럽지 않았다’고 하는 친구입니다. 조촐하게 귀환 파티를 마련하고 제이의 뜻에 따라 고기를 좀 구웠습니다.
“나오면 꼭 돼지갈비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냄새. 그 안에선 절대로 맡아볼 수 없거든요. 안에서 만난 언니가 나가면 자기 대신해서 꼭 돼지갈비를 먹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제가 거기서 막내였거든요. 딱 스무 살이 되자마자 들어간 거니까 나보다 어린애들은 없더라고요. 언니들이 다 나보고 벌써 들어오면 어떡하냐고 걱정해주시고 해서 저 정말 정신 차리고 살기로 했어요. 그 언니들 보면서 다 착하고 예쁜 언니들인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 와 있게 된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됐거든요. 그런데 같이 지내다 보니까 다 돈이더라고요. 돈은 필요한데 돈이 없으니까, 그 돈 구하느라고... 아무튼 언니들 이야기 들어보면 원인은 다 돈이에요. 돈이 없어서 죄를 짓는 거더라고요.”
제이는 큰 공부를 하고 나온 사람처럼 자신에 차 단호하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제이가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처음 보면서 제이에게는 그 시간과 장소가 ‘학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고 깨달은 게 많았던가 보네. 그래도 다시 가고 싶은 건 아니지?”
“그럼요. 일억을 준 데도 안 갈 거예요. 처음 두 달은 정말 많이 울었어요. 겁도 나고 춥고 배고프고, 언니들도 다 무서워 보이고. 그러다가 깨달았어요. 아, 여기도 사람 사는 데구나. 언니들이 잘 대해줘서 그다음부터는 하루하루를 잘살아 보자고 마음먹었죠. 저 거기서 텔레비전 뉴스를 처음 보았어요.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관심도 없었는데 할 일이 없어서 매일 저녁 뉴스를 보다 보니까 나중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나와서도 뉴스는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또 몰라서 당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 다이어트도 시작했어요.”
제이는 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회사에 취직이 되어 곧 출근할 예정입니다.
** 청소년 SOS 공감행동 비지트에 알음알음 후원을 원하시는 분은 인터넷 신문 다시 편집부(02-332-2693)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작성자: 라다키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