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패션 커뮤니티가 있다. 2,30대가 많아 이성과 관련한 썸, 소개팅, 연애 얘기가 많이 올라온다. 종종 '믿고 거르는 인간 유형'이란 주제로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믿고 거른다'는 사람들을 썩 좋게 보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편향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각자의 취향과 경험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 이해하는 마음도 조금 있다.
아무튼 자주 언급되는 '믿고 거르는'의 항목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술, 담배, 타투, 유학, 욕, 클럽, 특정 직업 등... 거르는 이유가 참 많기도 하다. 내가 포함되는 항목은 없었다. '타투' 빼곤.
내 타투
학교 다닐 때 독서 모임에 2년 넘게 참여했다. 6년 전 즈음이었나. 데미안을 읽었다. 데미안은 내 인생 책이 되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싱클레어가 세상 밖으로 나와 좌충우돌을 겪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이 나와 똑닮았다고 느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데미안을 읽었다면 모를 수 없는 구절이 나를 매료시켰다. 아브락사스는 닭의 머리, 사람의 몸, 뱀의 다리를 갖고 있는 방패와 채찍을 든 신이자 악마인 모순적인 존재다.
'abraxas' 타투
책을 읽을 당시 나는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게 고민이었다. 주관이 있어야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더 쉽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쪽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고 저 쪽 말을 들으면 저 말이 옳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믿고 거른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안 좋아하지만 존중은 한다라고 했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래서 아브락사스가 좋았다. 아브락사스의 의미가 완벽한 자아에 이를 수 있는 도달점이라고 이해했다. 아브락사스가 모순된 신이자 악마이듯, 회색 성향은 단점이 아니라, 양쪽을 고루 잘 이해해서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강점이라고 믿게 되었다. 혹시 언젠가 타투를 하게 되면 아브락사스를 팔에 새겨야지! 라고 생각을 했다.
타투를 하게 된 계기
3년 전 딱 이 맘 때였다. 삼성전자로 이직을 준비했었다. 자기소개서와 코딩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다. 서류와 코딩 시험에 합격해서 면접 준비도 최선을 다했다. 면접을 봤다. 모난 답변없이 잘 봤다. 부모님께 면접을 잘 봐서 붙을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내 생일과 합격 발표 시기가 겹쳤다. 합격한 기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휴가를 내고 혼자 세부로 4박5일 여행을 다녀왔다. 발표가 수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레저 활동과 캐녀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에서 합격 조회를 했다.
불합격이었다. 면접을 잘봤다고 오판하고 자만했던 거다. 나 아니면 누굴 뽑아?라는 마인드였는데 충격이었다. 그렇다고 여행은 3일이나 더 남아있는 상황. 울적한 마음을 계속 갖고 있을 수는 없었다. 행복해질 방법도 딱히 없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멋있는 타투를 한 사람이 떠올랐다. 결심했다. '이거다!'
숙소에서 구글에 타투샵을 검색했고 후기를 찾았다. 1층 로비로 내려가 전화를 빌렸다. 어중이떠중이 영어로 타투샵 직원과 대화를 했다. 내일 당장 타투를 받을 수 있냐고. 얼마냐고. 한화로 12만원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 타투샵에 찾아갔고, Roy라는 직원이 나를 반겨줬다. Roy는 내게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도 된다고 배려해줘서 빈지노 전곡 모음을 틀었다. 세부 도심에서 1시간 넘게 빈지노의 한국어 가사가 울려퍼지는 동안 타투가 내 오른팔 위에 그려졌다.
Roy에게 고마워서 짧은 영어로 남겼던 리뷰
3년이 지난 지금. 타투한 걸 후회하나?
뻔한 답이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나중에 우리 부모님이, 내 아들이, 내 손자가 본다고 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생이란 죽을때까지 의미와 답을 찾고,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믿는 신념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 본 사람들 중에 '딱 봐도 공대생처럼 보인다' 아니면 '너드같다'라는 말을 애둘러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공대생이고 대학원도 나온 너드라고 할 수 있겠으나 굳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다. 그렇지만 오른쪽 팔에 그려진 아브락사스 타투는 공대생이나 너드처럼 보이지 않아서 좋다. 이 사실을 반팔을 입어도 모를 만큼 안 보이는 위치에 해서 더 좋다.
믿고 거르든지 말든지 난 안 거를래
'믿고 거른다'로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의미가 없는 타투를 한 사람도 있다. 의미가 있는 타투를 한 사람도 있다. 의미 없는 타투를 한 사람을 거른다는 사람도 있다. 타투가 있으면 무조건 거르겠다는 사람도 있다.그런 사람을 거르는 사람도 있다. 또 그런 사람을 거르는 사람도...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골치 아파졌다. 나랑 잘 맞는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바쁜데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며 지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반대로 나랑 잘 맞는 사람들이랑만 지내면 그게 진정 나를 위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난 진짜 회색종자인 것 같다.
'믿고 거른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막상 눈 앞에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못 거를 수도 있다. 사람 일이 다 자기 생각처럼 되던가. 나는 누구든 안 거르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회색 종자고 아브락사스 타투도 팔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