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옷에 크게 관심 없는 공대생이다. 회사에서는 일하기 편한 옷들을 입고 다녔다. 여름에는 반팔티와 반바지, 그리고 검정색 반팔티. 겨울에는 무조건 따뜻한 기모와 패딩을 선호한다. 하지만 솔직히 나 정도면 괜찮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긴 했다. 공대생&개발자 평균 정도는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주관적인 생각이다.
내 여자친구는 컴퓨터공학을 졸업한 개발자인데 패션감각이 뛰어나다. 처음 봤을 때부터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옷을 잘 입는다고 생각했고, 뭔가 패션에 민감한 사람인 것 같았다. 핸드폰을 갤럭시를 쓰는 게 아주 의외일 정도로 트렌디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지금은 아이폰을 씀...)
그런 패션피플 여자친구와 썸을 타고 있을 때, 이상형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패션 센스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기념일날 전남자친구랑 사진을 같이 찍었는데, 그날 남자친구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집에 와서 너무 속상했다는 거다. 속상함을 넘어 분노(?) 같은 걸 느끼고 같이 찍었던 사진을 다 지웠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듣고 '아니 얼마나 옷이 맘에 안 들었길래...?' '와 나도 큰일났다ㅋㅋㅋㅋㅋㅋㅋㅋ 옷 좀 신경 써야겠네' 여러 생각이 들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웃겼다. 여자친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옷을 좀 신경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노란 잠바 패션 테러,
그리고 패션 지적. 아니 패션 코칭!
여자친구의 첫 패션 지적을 받게 된 건 사귄 지 일주일 됐을 때였다. 잘 보이려고 ZARA에서 노란색 잠바를 사서 입고 데이트를 나갔다. 여자친구는 나랑 만난 지 1시간이 지나서 "오빠 어 어.... 저기... 그 옷 새로 산 거야?"라며 고장난 반응을 보였다.
'아 이 옷은 너무 도전적이었구나...' 때가 왔음을 직감했고, 드디어 패션 지적이 시작된 거냐며 노란색 잠바가 너무 과했냐고, 오늘 같이 사진 찍으면 다 지울 거냐고 여자친구에게 장난을 쳤다.
여자친구는 "그런 거 아냐!!!ㅠㅜ 잠바'는' 너무 화사하고 예뻐. 오빠가 이런 옷도 입는 줄 몰랐어"라며 노란 잠바가 자기 청바지랑 티에 더 잘 어울린다고외투를 바꿔입자고 했다. 그리고 데이트가 끝날 때까지 서로 바꿔 입다가 헤어졌다.
문제의 노란 잠바. 내 시계도 뺏김...
노란잠바 사건 이후로 내 패션 센스와 스타일 얘기가 공론화됐다. 여자친구는 내 얼굴, 피부톤과 체형이 이러이러하니까 어떤 브랜드와 스타일로 입으면 좋을지 자세하게 알려주고 유튜브도 추천해줬다. 근데 워낙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게 얘기를 하기도 하고, 또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여자친구가 추천해 준 대로 입으면 내가 보기에도 내 룩이 훨씬 맘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 전속 패션디자이너가 생겼고, 옷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패션의 중요성
패션에 관심을 갖고 옷을 사서 입다 보니 변한 게 있다. 신경 써서 옷 입은 날은 괜히 기분이 좋고 자신감도 더 생겼다. 펑퍼짐하고 따뜻한 패딩을 입었을 때보다 코트를 입었을 때. 상하의와 아우터, 신발과 양말이 잘 매치되었을 때 괜히 뿌듯했다. 회사와 집에 있는 전신 거울, 쇼윈도를 볼 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맘에 들었다. 패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여자친구를 만나고 나서 내가 사거나 가족과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아이템들은 다음과 같다. 3개월 동안 산 거니까 많이 사긴 했다.
코트 3개, 잠바 2개
집업니트 3개, 캐시미어니트 2개
바지 4개
구두 1개, 신발 1개
가방 2개, 안경 1개
칭찬은 패션테러리스트도 춤추게 한다
올해 초, 새로운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전 직장에서 내 옷차림은 공대생&개발자 그 자체였다. 검정 반팔티와 반바지, 추우면 후리스, 패딩. 하지만 새 직장을 다닐 때는 패션에 대한 관심도 많이 생겼고, 옷도 많이 샀던 터라 어느 정도 신경써서 출근을 했다.
지난주에 마케팅 팀과 얼굴과 말을 틀 겸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마케팅팀 여러 사람이 내 패션과 스타일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
'상하님 옷 좋아하시나봐요. 늘 댄디하게 입고 다니시는 것 같아요!
'상하님 스타일리시하시네. 멋있으세요!'
마케팅 팀 사람들은 다 나보다 훨씬 옷을 잘 입는다. 그런 분들에게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3주간 나와 말 한마디도 안 한 사람들인데, 내 옷차림을 기억했다가 칭찬해준 거라 더 고마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나를 잘 알지 못하는데도 오다가다 보며 내 옷차림은 기억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예전엔 일할 때 편하고, 추울 땐 따뜻하고, 더울 땐 시원한 옷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껍데기에 과하게 돈 쓰고 시간 써서 뭐하나, 본질이 중요하지'라고. 하지만 옷차림을 통해 나의 이미지와 인상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표현할 수 있고, 옷을 잘 입은 나를 보면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깨달았다.
껍데기에 신경 쓰는 2023년
여자친구 덕분에 옷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 사람들에게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패션에 대해 칭찬을 받은 것 같다. 아무래도 2023년은 내 인생에서 패션에 가장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건강한 몸과 마음의 중요성은 워낙 잘 알고 있으니, 건강한 몸과 마음을 포장하고 있는 껍데기를 가꾸는 일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더 멋진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