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교사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
나는 그만둘 수 있었다.
며칠 전, 인천의 한 초등학교 특수 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이초 초등교사에 이어 또 아까운 인재가 이 세상을 등져야만 했던 이유는 뭘까.
학교급 중에서 유독 유초등에서 사건이 잊힐만하면 다시 불거진다.
서이초 사건은 학부모 과도한 민원으로 힘들었던 점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보니 학부모 민원만이 문제가 아니겠다 싶다.
법으로 제정되어 있는 초등학교 특수학급의 한 반 인원수는 6명이라고 한다. 유치원은 한 학급 인원수 4명이다. 이 초등학교에는 2 학급이 있었는데, 학생 수가 줄어듦에 따라 1 학급으로 축소되었다. 1명의 교사가 맡게 되었는데, 학기 중간에 특수 학생이 전입에 옴에 따라 혼자 학생들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특수 아동일 경우 특수교사뿐 아니라 특수실무사도 함께 배치되는데, 내가 알기론 한 학급당 1명 배치로 알고 있다.
원래 있던 6명의 특수 아동과 비특수 학급에서 지원받아야 하는 특수아동이 8명이나 또 있다고 했다. 이걸 특수교사가 혼자 했다면 정말 죽고 싶었을 것이다.
행정업무는 또 어떠랴. 아이들이 학급에 적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정말 큰 착각이다. 각 아이들마다 개별화교육계획을 세워야 하고, 각 아이들마다 진단 및 평가를 해야 하며, 각 개별 특성이 다르니 그것에 맞춰 교육계획도 세워야 한다. 그에 따른 교구 및 교재도 다 따로 구입하는 기안을 해야 한다. 그냥 나열만 한 것인데도 이 정도이다. 각 수업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기본 값이다.
게다가 학부모까지 집 앞까지 데려가라 데려오라는 민원까지 들었으면 이건 업무과중을 넘어서 자살방조나 다름없다. 게다가 교육청에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면 아예 나 몰라라 한 것이다. 교사가 맨 마지막으로 정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요청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웬만해서는 학교 내에서 처리하려고 하기에 교육청에 SOS를 치는 것은 교감과 교장이 할 수 있는 지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물론 방관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 도움을 절실하게 구했지만, 희망적인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는 특수아 지원을 해본 적도 있고, 내가 맡은 비특수 반이 힘들어 도와 달라고 해 본 적도 있다.
특수아를 지도하고 함께 있는다는 것은 아주 많은 인내심과 체력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휘두르는 주먹에 맞기도 하고, 연필심에 찔리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도 어느 정도의 사명감이 없으면 밀착 지원이 힘들다. 나보다 힘이 더 센 아이도 있다. 나는 특수 유아를 맡았었는데도 그랬다. 말이 유아지,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우람한 몸을 신체적 학대라고 의심받지 않도록 적절히 제어해야 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지원이 풍부한 곳에 다녀서 그나마 괜찮았다. 중증유아 1명, 중경증 유아 2명, 경증유아 1명이 한 반이고 연령이 5세, 6세, 7세로 혼합 반이었다.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와의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아 계약기간까지 참고 다녔었다. 내가 처음이라 서툴러서 그랬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내가 겪은 상황이 정말 괜찮은 환경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게 정말 사람이 할 강도인지 모르겠다. 부모도 자기 자식 1명 케어하는 것도 힘든 것을 잘 알 텐데. 그런 아이들 4명에서 6명까지 특수교사 한 사람이 온전히 지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랍다.
너무 힘들어 계속 도와 달라고 요청했는데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가 나도 있었다.
내가 맡은 유치원 방과 후에 인원수는 25명이었다. 다행히 혼합연령은 아니었지만, 각 반에서 방과 후를 신청하는 유아들을 모아 재편성한 반이었다. 아이들과 연계된 담임도 2명이어서 각각 연락을 해야 했다. 그 유아들은 기분 나쁘면 뛰어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애, 이로 친구를 무는 애, 고집부리는 애, 친구들에게 욕을 하는 애, 선생님의 생활지도에 불복하는 애, 생떼를 부리느라 바닥에 눕는 애 등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전에 맡았던 선생님이 힘들어 그만두셨다고 했다. 내가 4번째라나.
처음에 한 달은 괜찮았다. 아이들도 새로운 사람이니 탐색하느라 서로들 데면데면했었다. 조금씩 아이들이 본색이 드러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나도 도와 달라고 여러 방면으로 이야기했지만, 나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지만, 어떻게든 나의 숨겨진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의지를 끌어내 내가 스스로 문제를 타파하기를 바란 것 같았다.
학부모 민원은 덤이다. 아이들이 다양한 만큼, 부모들도 다양하다. 세세한 요구를 다 들어주고 싶지만, 들어줄 수도 없고, 그 만한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학부모는 원장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면 그 요구안대로 또다시 동선을 짜야하고 업무가 새로 또 내려온다.
내가 계속 있어 봐야 유치원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떠날 수 있었다.
떠나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
끝까지 책임지려 했지만
방법을 몰랐던 건 아닐까.
그렇게 해서라도
문제를 풀어달라는,
마지막 목소리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