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누구나 누르면 발작하는 버튼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생긴 발작버튼이 많은 것 같다. 어떤 단어나 작은 사건 같은 것이 트리거가 되어 나도 모르게 과격하게 말도 하고 행동한다. 지나고 나면 왜 그랬는지 자책하고 그 원인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그건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라 아무리 조심하려 하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그날도 그냥 그저그런 평화로운 날이었다.
7세 아이들은 인지능력이나 신체능력 등이 어느 정도 어른과 대화할만한 수준이어서 때와 장소를 가려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나름 아이들과 장난을 치기도 한다. 아이들도 내가 친근하게 느껴지면 같이 장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친하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아줌마'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냥, 애들이 한 말이고, 아이들이 장난으로 한 말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내게는 그 말이 너무 충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솜주먹으로 나를 때린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 말은 어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솜주먹같은 느낌으로, 귀엽고 작은 입에서 내던져졌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이 너무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훈육을 했다는 이유로 학부모에게 민원을 받은 적이 있는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옆집아줌마같이 행동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개임용고사를 치르지 않고 아이들의 돌봄을 주로 하는 인력들은 사실 '선생님'도 '아줌마'도 그 어떤 명칭도 공식화된 것은 없다. 단지 아이들에게 똑같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뿐이다. 동등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같은 교직원의 대우를 받는 것 같지만, 민원이 들어오거나 하면 철저히 선을 긋는다.
아무리 교육과정을 수행하는 교원이 아니더라도 엄연히 한 학급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인데, 아이들에게 '아줌마'란 얘기를 하도록 두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제기하면 어찌되었든 관리자를 싫어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너무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문제인 것 같긴 하다. 아이들이 옆집 아줌마처럼 느꼈다는 것은 학급을 이끌어가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급의 규칙을 어겨도 괜찮을 것 같고, 마음대로 다 해도 선생님이 받아줄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친해졌다고 느꼈다가 선생님이 훈육한다고 단호하게 대하면 아이들에게 편애하는 나쁜 선생으로 둔갑해 있을 것이다. 항상 당하면서도 나는 완급조절을 잘 못한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것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이 있을까.
하지만 나의 알량한 선생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이 무사안일과 맞붙어 잠깐 신경전을 벌이다가 이전 사건으로 인한 PTSD로 후자를 택한다. 가장 쉬운 대처인 '무시'를 택한다.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인데, 교육심리학적 용어로는 '소거'라고도 한다. 적극적인 훈육보다는 소극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아주 가끔씩 쓰면 효과가 있는 방법이라, 아이들이 정말 선 넘을 때만 사용한다.
모난 행동들을 하는 아이들도 사실 뭘 모르고 한다는 걸 안다. 그걸 가르치는 것은 순전히 교사에게만 맡길 수도 없다. 학교에서는 학부모의 민원이 들어오지만 않으면 괜찮으니, 고무줄 같은 학교마다의 지침은 나를 한껏 눈치보게 만든다.
어떻게 해야 학부모의 민원없이 훈육을 할 수 있나.
새삼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들이 대단스럽긴 하다. (그렇다고 내가 꼭 옳은 행동을 한다는 확신은 없다. 난 쫄보니까.)
이런 내적 갈등을 언제까지 겪으면서 일해야 할까.
아이들이 귀엽고 가까이 있고 싶어 선택한 일이지만,
박봉에(교원월급 낮다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낮은 처우), 학교 내에서의 철저한 신분차별에, 학교마다 다른 관리자의 재량에 휘둘리는 자리...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은 없다는 걸 아는 나이지만,
작고 귀여운 존재에게 발작버튼을 눌리는 일은
항상 아프다.
시간이 지나서 발작 버튼이 사라지게 되는 날, 나는 조금 더 여유만만해지리라.
내가 아줌마든 아가씨든, 이 학급에 있는 유일한 성인은 '나'고
아이들이 있는 시간동안 내가 이 학급의 '선생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