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시간이 가고
밤이 찾아오면
좁은 방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가 있다.
그는 뻥 뚫려있는 나를 향해 조용히 손을 뻗어
나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 부유한다.
그러면
심연을 고요하게 내려앉는
그림들, 소리들, 글들 사이로
어수선히 뒤적거리는 손짓들
지나간 사람들의 속닥거리는 이야기가 들리고
...
안락한 평온에 스르르 눈을 감으면
그네는 가끔씩 내게 환영을 보여준다.
세상을 아주 조금 닮아 있는 비밀들을.
나는 가만히 잠들어 미소를 짓는다.
분명 내가 좋아했을 성싶은 친근한 사물들이 이상할 만큼 뚜렷하게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존재들은 여전히 막연하기만 했다. 그들의 환영 같은 얼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면, 이내 그 생김새들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어렴풋이 윤곽만 비쳐 보이는 박명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육신들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의 이미 멀어저간 형태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그들과 교류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감정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보고 듣기를 열렬히 원하는 그리고 그 육신이 사라져버린 그들이 내 회한 앞에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저 다정한 입김뿐이였다. 매 순간 나는 그것이 사라질까 두려웠으니, 그 가벼운 김은 그토록 엷어 보였다.
P112
"아니, 내게 고향이라곤 서너사람의 영혼 뿐이야......" 다시금 그녀들은 침묵했다. 라기는 방을 가로질러 불 앞에 가서 앉았다.
P168
이아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