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여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명 Aug 16. 2015

여백의 수변, 여수

공간을 걷는 기쁨이 있는 여수여행

작년 1월 퇴사 후, 개인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놀았다. 올해 늦봄까지 쭉. 전문 백수 생활의 마침표를 세계여행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돈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마침 몇개월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얻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완전한 휴식.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역시나 일은 일이다. 휴식이 필요했다. 완전한 휴식.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래서 일요일 밤 만취 후 휴가인 월요일 숙취 범벅이 되었다. 멍한 상태로 화장실에서 일을 보며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티켓을 끊었다. 여수행 밤기차.


무박이일의 무계획 여행. 뭐, 원래 혼자하는 여행에 특별한 계획 같은 걸 세우는 스타일이 아니긴 하지만 여수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좀 더 궁금해졌다. 여수밤바다? 엑스포? 케이블카? ......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는 곳이었지만 전라도의 남해를 본 적 없으니 그 바다를 보는 즐거움 하나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오래 머물 시간도 없으니까.


기차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무척 피곤한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설렘때문인지 기차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도착한 시간은 새벽4시. 나와 같이 도착한 사람들은 역 앞에서 택시를 잡거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가장 가까운 밤바다가 보고 싶었으므로 어두컴컴한 여수엑스포를 가로질러 들어갔다. 엑스포가 바다에 인접해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으므로.

한산한 공간을
여유가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엠블호텔이 나오고 오동도로 가는 길이 보였다. 여수에 간다고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제일 먼저 달린 댓글이 오동도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은 어두컴컴해서 일출이나 보려고 편의점에서 물 한통을 사서 마시며 바다 주변을 이리저리 걸었다. 엑스포가 있고, 호텔이 있고, 오동도라는 유명 관광지(?)가 있는 곳 부근임에도 왠만한 여행지들보다 한산했다. 새벽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날이 밝아도 한산할 것 같은 느낌. 관광지 특유의 번잡함 대신 여유가 그 부근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동도 너머로 해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는데, 자그마한 섬들과 구름이 뭉쳐 커다란 산 같이 보였다. 그러나 해가 본격적으로 떠오르고 빛이 강해져 섬과 구름 사이를 뚫게되자 섬은 섬, 구름은 구름으로 나뉘었다. 빛은 언제나 진실을 가려낸다. 그 풍경에 취해 오동도 끝까지 걸어갔다가 땀을 식힌 후 다시 걸어나왔다. 아침 산책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작은 마을 분위기다.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개운치않은 느낌 때문에 몸을 좀 씻고 싶어서 목욕탕이나 사우나 비슷한 것을 찾아 또 다시 걸었다. 걷다보니 완연한 아침이 됐다. 평일 오전 출근시간인데 가는 동네가 모두 한적하다. 분주한 걸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걸음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길을 나도 천천히 걷다보니, 뭐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호젓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복잡하지 않아서
마음엔 시원함을 안겨줬다.


사우나는 찾지 못했다. 쉬다 걷다 하며 한시간 좀 넘게 걸었을까. 진남관이 보였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문 앞까지 계단을 올라 여수 앞 바다를 본다. 크게 뻥 뚫린 모습이라기보다는 섬, 배 등 작고 소박한 것들이 바다 위 여기저기 띄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복잡하지 않아서 마음엔 시원함을 안겨줬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쉬다가 또 다시 사우나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조급한 마음이 없으니
당연히 걷는 것이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오동도에서 떠나 2시간 쯤이 더 흐른 오전 8시. 돌산대교를 지나 여수한증막이라는 곳을 겨우 찾았다. 새벽 4시 정도에 기차에서 내려 걸었으니 내리 4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나 스스로가 놀랐다. 최근에 이렇게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것도 내가 어느정도 걷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여수 곳곳을 거닐며 여유로운 장면을 발견했고, 그렇기에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으며, 조급한 마음이 없으니 당연히 걷는 것이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한증막에서 샤워 후 잠깐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보니 11시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따가웠다. 바람은 시원했다. 기분이 붕 떴다. 또 걸었다. 걷다가 버스를 타고 진남관 쪽으로 다시 갔더니 아까보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래도 북적거림은 없었다. 문이 열린 진남관은 큰 건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을 듣다가 구석의 나무그늘로 가 앉았다. 새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나뭇잎이 바람에 서로를 비비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내가 지난 밤 탔던 것은
여수행 밤기차가 아니라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었던 것 같았다.


진남관에서 내려와 이순신광장 부근을 이리저리 걸었다. 골목골목 다니다가 문득 새벽부터 아침까지 걸었던 느낌이 떠올랐는데, 머릿속에 든 단 하나의 생각은 '여수, 정말 작고 소박하구나'라는 것이었다. 어릴적 살던 동네 같았다. 내가 지난 밤 탔던 것은 여수행 밤기차가 아니라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었던 것 같았다. 요즘 부쩍 이런 식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슬슬 허기가 찾아와 먹거리를 찾아봤더니 50년 전통의 함흥냉면집이 있었다. '함남면옥'. 마침 새롭게 연재를 시작한 <대면관계>에 쓸만한 가게를 찾고 있었기에 고민하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 면음식으로 50년이라면 잘하든 못하든 무조건 쓸만할 꺼리가 있을거라 믿으며. 먹어보니 쓸 이야기가 생각났다. 냉면을 먹으며 대면관계에 쓸 내용들을 메모해뒀다.

할머니들의 사투리가
귀에 찰지게 박히는 것을
BGM삼으며
창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바다가 둘러싼 곳에 왔으니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해변을 찾아보니 만성리 검은모래해변이라는 곳이 있었다. 20분 정도 버스를 기다린 후 타고 시원한 에어컨바람을 맞으며 이동했다. 버스 안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사투리가 귀에 찰지게 박히는 것을 BGM삼으며 창 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만성리 검은모래해변으로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버스를 기다린 시간과 비슷했다. 해변에 도착하니 사람이 꽤 있었다. 기대했던것과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구석에 자리를 잡고 책을 꺼냈다. 몇해 전 강릉 경포대에서 책을 읽었던 느낌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더웠다. 이내 책을 덮고 바다로 갔다. 뜨겁게 달궈진 검은 모래에 발바닥이 화상을 입는 기분이었지만 뜨거움 때문에 촐싹거리며 걷는 내 모습이 스스로 우스워 무척 재미있었다.


무슨 바쁜 일이 그렇게 많다고
이런 시간 한 번
제대로 갖지 못했나


생전 처음 온 전라도 남해의 바다가 올해 처음 발을 담가보는 바다였다. 발등과 발목, 종아리를 찰팍 거리며 건드리는 잔파도의 느낌을 만끽하며 '무슨 바쁜 일이 그렇게 많다고 이런 시간 한 번 제대로 갖지 못했나'라는 생각을 했다. 표를 예매한 어제 낮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특별한 계획이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출발하면 되는 것이었고, 쉬는 날이라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생각해보면, 삶의 많은 부분들이 그렇다. 결심이나 계획보다는 그저 하고 싶어서 해도 되는 것들이 많다. 어차피 삶이라는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계획대로 되는 경우보다 훨씬 많지 않은가. 왜 스스로에게 이런 여백, 틈을 내지 못했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했던 그 동안의 내 삶이 좀 아깝게 느껴졌다. 삶에서 틈을 낼 수만 있다면 떠나지 않아도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떠나는 것은 둘째치고 틈을 낼 생각도 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수는
'삶을 좀 더 사람 사는 것 처럼 살라'고 일깨워주는
여백의 메타포가 되었다.



갑자기 결정해서 바로 떠나온 여수에서 생각의 여백을 좀 더 넓힌 것 같다. 걸음을 옮기는 모든 곳에서 여백을 발견했던 여수. 공간적 여백 속을 걸으며 내면적 여백이 확장된 기분이란, 여백의 수변 도시 여수가 내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난 여행자일 뿐이었지만, 나에게 들어온 여수는 '삶을 좀 더 사람 사는 것 처럼 살라'고 일깨워주는 여백의 메타포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에 산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